"내 이름은 나미, 혈육과 고향을 찾아 주세요."
8월은 우리 민족에게 36년간의 치욕의 족쇄를 풀어준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준 달이다. 한철 한 생명의 8월은 한 인생의 클라이막스를 보는 것과도 같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해방의 만세 소리 그때 그 함성, 그 감격을 잊어서는 안되는 8월이다.
"내 이름은 나미 입니다. 혈육과 고향을 찾아 주세요." 50년만에 고국의 땅을 밟고, 도화지에 그려 쓴 팻말을 들고, 서울 하늘 김포공항을 눈물 젖어 나오는 훈 할머니 기사를 보면서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을 그리고 무엇엔 가의 분노가 치밀어 왔다.
꽃같은 청춘에 일본군대 징용위안부로 끌려가 동물 같은 취급을 받고 한 인생을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캄보디아에서 살아 돌아온 73세의 할머니가 된 한 여인의 운명을 보면서, 역사의 장난에 노리갯감이 되고 있는 인간 모두의 모습을 보는 듯,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낀 채로 돌아가야 하는 구조 악에 치가 떨린다. 평범한 한 인간의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은 기본적 요구가 송두리째 부서져 버린 이 비극이 어찌 '훈 할머니' 한 사람에게만 있을 것인가.
그어 논 38선 하나로 아직도 북쪽은 김일성 망령이 인간을 사로잡아 인간성을 노예화 생매장하고 있다. 해방이 되고 가까스로 목숨걸고 38선을 넘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이기적인 안도감 마저 들기조차 한다.
인간은 관계 속에 태어나, 관계 속에 살다가, 관계가 끈 어진 죽음이라는 단절로 한 인생이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 생명이 생명 관계를 가지를 뻗듯이 펼치면서 한 인생이 자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관계와 관계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한번 맺어진 인간 관계는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생명처럼 자라는 생명이다. 가꾸면 더욱 싱싱해지고, 내 버려두면 메말라 버리는 것이다.
지금 맺어진 관계를 다시 한번 귀하게 보고 물을 주고 가꾸어 보는 8월이고 싶다.
키프링의 "숲을 지키는 사람"에 나오는 이야기다.
깊은 산 속에 산불을 예방하고 산림을 보호하는 사람이 있다. 이 숲지기는 홀로 산다. 낮에는 나무를 베고 밤에는 통나무집에서 잔다. 친구라곤 대리고 간 개 한 마리, 들짐승들 과 산새들밖에 없다. 아무도 없는 산 깊은 숲속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저녁에는 하루동안 흐른 땀을 씻고, 손님이라도 맞이하는 주인처럼 부엌에 가서 음식을 준비해서 식탁에 정식으로 차려 논다. 그리고 들어가 정장으로 갈아입고 나와 식사를 한다. 마치 위대한 귀빈과 식탁을 함께 하는 것과 같은 자세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옷을 갈아입고 그릇을 씻고 잠자리에 든다.
어느 날 정부관리가 순회 시찰을 와서 며칠동안 이 사람과 지나게되었다. 날마다 똑 같은 작업을 하고 저녁때 피곤에 지쳐 아무렇게나 자버릴 수 있는데 정장을 하고 저녁 식탁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물어 보았다. "아니, 아무도 없는 이 깊은 산 속에서 누가 본다고, 정장을 하고 저녁 정식을 그렇게도 정성스럽게 예의를 갖춥니까?" 관리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예, 나는 내가 혼자만 사는 이 숲속에서 아무렇게나 살다가 그것이 습관이 되어 동물처럼 될까 걱정도 되고요, 이다음에 가정으로 돌아가서도 사람됨의 예의를 잃지 않기 위해서 그럽니다. 그래서 매일 저녁 나는 가장 귀한 손님을 모시듯 식탁을 준비하고 그분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처럼 합니다." 반세기를 끌려 다닌 풍랑 운명의 표류 속에서도 '훈 할머니'는 그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와 맺어진 혈육의 관계를 죽기 전에 한번은 기어이 찾고 싶었다. 아무리 잔인한 역사가 찢고 짖밟아버린 인생이지만 그 '훈 할머니'는 73세에도 기어이 한 맺힌 아리랑을 불러보며 핏줄의 관계를 찾아 온 것이다. 한 맺힌 우리민족의 기구한 과거를 이 한사람에게서 우리는 보고 있다.
지금, 우리는 가까이 있는 너무도 소중한 행복의 조건은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장 귀한 관계는 끊어버리고 자기 안에만 갇혀 있는 단절은 없는 것인가? 우리민족만의 관계가 아닌 세계 여러 민족들의 관계는 외면해도 되는 세상관계일까?
전쟁의 군화에 짓밟히고 역사의 장난이 아무리 잔인해도 기어이 찾아 돌아온 '훈 할머니'의 인생을 보면서, 우리도 이미 있는 관계를 더욱 소중히 가꾸고, 잊고 있는 관계를 다시 찾아야만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