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의식과 탕자의 비극
이 쇼펜하우어는 현대의 교만과 현대인의 착각과 현대인의 허위와 현대인의 값싼 낙관주의를 철창으로 질그룻을 때려 부수듯이 산산이 깨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의 의지의 비유 속에 이런 이야기가 있읍니다. 자바섬의 해변가에는 거북이가 해마다 돌아와서 모래 사장 깊숙이 알을 수십 개씩 낳습니다. 이때 숨어 있던 들개들이 달려들어 거북이를 뒤집어서 꼼짝 못하게 해놓고 거북이의 창자를 내어 먹습니다. 등에 두꺼운 딱지가 붙어 있으니까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모래 사장에는 거북이들의 시체가 에스겔서 골짜기의 해골 떼처럼 가득하게 됩니다. 이 비유를 들어서 쇼펜하우어는 묻고 있읍니다. '삶의 의지는 누가 만들었는가? 잡아먹기 위해서 있는 것인가? 잡아먹히기 위해서 있는 것인가? 저러한 일이 삶의 의지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들개도 먹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며,이 거북이도 삶의 의지 속에서 그런 것이라면 생의 의지의 비극이 아닌가? 먹히기 위해서 태어난 것, 또한 잡아먹기 위해서 태어난 것, 이 살육과 전쟁, 무서운 생존 경쟁, 이것이 인류의 역사가 아닌가?' 하고 그는 반문합니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 이 모든 생(生)의 현상 원동력은 맹목적인 삶의 의지, 비극의 의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적인 지옥의 탄식이 나옵니다. 쇼펜하우어는 단테의 지옥보다 더 창백합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밑바닥 속에 흐르고 있는 탕자의 비극과 탕자의 절규를, 탕자의 깊은 탄식과 탕자의 비애를, 탕자의 불행과 탕자의 지옥을 발견해야 될 것입니다. (전 12: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