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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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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님의 마음으로 행하십시오”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양과 염소’의 비유 (마 25:31∼46)

    겉보기에 비슷하면서도 매우 다른 두 동물들로 양과 염소를 들 수 있다. 그들의 다른 점들 중에서 한 예를 들자면-겉으로 보아 짐작하기 어려운 점이지만-염소는 밤만 되면 추위에 약해 밖에 놓아둘 수 없어 지붕 덮인 우리 속에 넣어야 하는데 양은 오히려 열린 공간을 선호한다.

    그러나 그 어떤 다른 것보다 특이한 점을 성경적인 면에서 살펴볼 때 발견할 수 있다. 성경에서 양과 염소는 마치 동과 서가 대조를 이루는 것같이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먼저 양은 하나님 백성의 상징(겔 34:10 등)으로 쓰였으며, 양을 돌보는 목자로 여호와 하나님(겔 34:15) 또는 메시아(겔 34:23)를 들고 있으며, 양은 ‘깨끗함/의로움’의 상징이며 그 털은 깨끗함을 넘어 ‘흰색 중에 흰색’을 묘사할 때 사용되어지곤 한다. 그러나 이와 대조로 염소는 ‘죄/악’과 연결되어져 있다.

    한 예로 레위기 16장을 보면 우리 성경에 아사셀(레 16:8)로 선택된 염소는 22절에 묘사되어 있듯이 모든 불의를 지고 광야에 놓여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모습이 영어의 ‘scapegoat’(우리말로는 ‘희생염소’라 하지 않고 희생양, 속죄양이라고 부를지라도)라는 단어의 배경이며 실제로 영어 성경(NIV 등)에서는 아사셀을 scapegoat로 해석하고 있다. 이 비유에서는 양과 염소의 대조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 일어날 모든 인간들을 두 부류로 나누는 심판의 모습과 연결시키고 있다.

    1.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관찰

    이 비유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두 가지 난해한 질문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첫 번째는 가난한 자, 갇힌 자, 병든 자 등의 무리들을 향하여 예수님이 내 형제(40절)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과 예수님과의 어떤 특별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첫 번째 의문점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그러한 ‘불쌍한 자들’을 돌아보는 것이 이 비유 속에 나타나 있듯 결국 영벌과 영생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진리에 충돌하는 가르침이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마태복음 속에서 이 비유를 살펴 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little one)(40, 45절)라는 표현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전도 여행을 보내시며 그들을 지칭하시며 소자들(little ones)(10:42)이라는 표현을 쓰셨고,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며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자(little one)(마 18:6)라고 부르셨다. ‘불쌍한 무리’들을 향하여 ‘형제’라고 쓰셨을 때, 우선적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단어의 의미 자체가 기독교적인 의미로서의 ‘형제’로 쓰셨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 되신 그분은 그분의 나라에 속한 자들 중 가장 ‘작은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심으로 그분의 겸손함을 나타낸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놓고 비유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이미 앞에서 지적한 중요한 원리 하나를 다시 한번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원리는 성경의 다른 부분을 해석하는 데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원리로서, 바로 ‘분명한 가르침이 분명하지 않은 가르침을 우선한다’는 것이다. 즉, 어느 한 애매한 가르침 자체가 다른 곳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어지는 분명한 가르침을 뒤집어엎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마태복음만을 보아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불쌍한 자들을 향하여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향한 뜻이다라는 것이 성경에서 명확하다면 이러한 사랑의 행동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이 믿음이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결국 이 비유는 ‘믿음 외에 다른 방법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믿는 이들이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선한 일은 인간을 구원하는 ‘근거 또는 원인’이 되기보다는 당연한 ‘결과’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러한 질문들을 보며 하나의 비유가 줄 수 있는 가르침의 한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2.이 비유를 통해 얻는 교훈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귀중한 가르침을 주시고 있다. 첫째, 모든 이들이 예외 없이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심판에는 예외도 없으며, 어떠한 인종적, 계층적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일지라도 예수님의 변혁의 사역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 그들의 ‘행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행하지 않음의 죄’(sin of omission)로 인하여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변혁의 사역에의 참여는 선택이 아니고 당위성을 지닌 믿는 자들의 책임과 의무이다.

    셋째, 자신들의 속한 이 세상에서 사회적 책임을 행하며 사는 예수의 참 제자의 삶을 사는 자들은 마지막 심판에서 칭찬과 상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들의 구원받은 삶 속에서 신실함과 근면함을 증명한 것에 대한 상급을 받을 것이다.

    3.이 비유의 교훈과 우리의 현실

    이 비유는 우리의 일반적 ‘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바꾸기를 원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범죄함/죄’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함’(sin of commission)이라는 면에 국한시키고 있으나 성경에서는 다른 종류의 죄도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바로 ‘행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행하지 않는 무(無)행위’(sin of omission) 또한 죄라고 가르치고 있다.

    위의 비유는 전자의 죄를 행하지 않았다고 만족하는 자들을 향해 후자의 죄에 관하여는 어떠한가를 돌아보도록 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행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행하지 않음’으로 인한 죄로 인해 궁극적으로 심판을 당할 수 있음을 우리 믿는 이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야고보서 4장 17절에 정리되어 있듯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결국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변혁의 사역이 단순히 영적인 영역에 국한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주장되어지고 있는 지극히 단순 논리적이며, 잘못된 이해인 ‘구원 자체를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로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경고를 주고 있다. 바로 구원함을 얻은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그분의 제자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어 보이셨듯이, 그들이 속한 사회라는 공동체에 관심을 보이며, 돌보며, 봉사하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현상유지에 만족하거나 어떠한 변화도 거부하는 병적이며 심지어는 직업적인 듯한 ‘보수(conservative)를 위한 보수’에 속하는 자들은 결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변혁의 사역에 동참자들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 모습과 순간을 꿈꾸며 변화와 변혁의 사역을 이루어 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하였듯이 주위의 가난한 자들을, 소외된 자들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돌아보는 다시 말해 한 손에는 복음을 다른 손에는 사랑을 가지고 전하는 ‘쌍손 선교’가 필요하다. 이러한 사역은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 속에 품을 때만이 가능하다. 우리 모두에게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 가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당신은 하루를 시작하며 그분의 마음을 품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시작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