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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25시, 민족수난의 긴 터널을 지나…

    1944년 초 제2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나는 만주 목단강성(省) 목능에 있던 만주척식회사에서 한국 개척농민 부락을 돕는 농산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봉천신학교로부터 입학허가를 받던 날, 일본 관동군(關東軍)에서 징병소집 영장이 나왔다. 나는 그때 일본군의 총알받이로 개죽음을 당할 수 없다는 생각과, 주님의 인도하심도 분명한 듯하여잠적을 결심했다. 영광 불갑사 해불암자에 사십 일을 숨어 금식하며 기도하다가 고향 지도(知島)에 갔더니 아버지께선 이미 지서에 잡혀가 나의 행방에 대해 추궁과 심한 고문을 당하고 계셨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자수를 했다.

    목포로 이송되어진 나는 죄수들, 그리고 마구잡이로 징용되어온 노무자들과 함께 남방섬 죽음의 전쟁터를 향한 수송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판사판으로 필사의 탈출을 시도했다.

    007첩보원처럼 숨바꼭질을 해서 중소(中蘇) 국경으로 가려고 기차를 탔는데 평양 가까이서 검문헌병에게 붙잡혀 평양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이제는 죽었구나.’ 싶었다. 다니엘의 사자굴 기적을 생각하며 빌었다. 헌병대로 연행되어 가는 길에 그 헌병은 일단의 일본인 무리들과 조우했다. 그들은 고향 사람들인 듯 어린아이같이 좋아하며 그들과 왁자지껄 어울려 얘기하다 나를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 틈을 이용,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행인들 속으로 도망쳤다.

    그럭저럭 한 달만에 목단강 시(市)에 도착하여 그곳 성결교회로 가 나를 아들처럼 사랑해준 김인석 목사님을 찾았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김 목사님의 행방을 모른다고 했다. 결국 교회의 사찰 집사님께 김 목사님과 주고 받은 편지를 보여주니 그제야 “기차로 두만강 쪽으로 가다가 석두라는 역에 내려서 백 리를 걸어가면 마창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거기에 목사님이 계신다.”고 일러주었다.

    마창은 소만(蘇滿)국경, 일본 관동군의 작전지역인데 거기에는 약 2천명의 화전민들을 모아다가 조성한 특별감시와 보호를 받는 부락이 있었다. 군대가 발행하는 거주증(居住證)이 없이 일곱 개나 되는 경비초소를 통과하기란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었지만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기적같이 마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마을은 중세의 요새처럼 토성(土城) 안에 있었다.

    그곳에는 해방 후 해군 군목실장을 지내신 인광식 목사님과 김인석 목사님, 그리고 강원용 목사님도 와 계셨다. 2천명 부락의 장(長)이신 인 장로님(인광식 목사의 부친)은 그곳에서 추장같은 분이었다. 나는 일 년 간 김 목사님 댁의 식객이 되어 그분의 책은 물론 인 목사님의 책까지 있는대로 읽었다. 인근 마을은 소련 스파이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었다. 나도 잡히면 죽을 몸이라 매일같이 교회에 가서 밤을 새워 기도했다.

    그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새벽기도 시간마다 만나게 되는 미모의 처녀가 있었다. 인광식 목사님의 동생이고 그 마을 유일의 여학교 졸업생이었다(후에 내 아내가 되었는데 6.25때 순교했다.)

    농민들은 원시림을 태워 일군 화전에서 농사를 짓는데 일 년 농사가 삼 년 먹을 만큼 풍요 했고, 버들방죽 냇가에 낚시를 던지면 팔뚝만한 이면수가 잡혔다. 눈이 쌓이면 노루나 꿩이 인가로 찾아들고, 사람의 키가 묻힐 만큼 낙엽이 쌓인 원시림 속에 아름드리 썩은 고목들이 넘어져 있는데 그 빈 몸통에서 수백년 동안 산벌 떼가 모아놓은 굳은 꿀을 여덟 초롱이나 따기도 하는 곳이었다.

    숨쉬듯 드린 나의 기도는 살려만 주시면 어떻게 어떻게 살겠다는 것과, 일본이 망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시간마다 라디오로 전황을 분석했다. 일본 해군이 전멸한 듯 했다. 미국의 B29기가 동경과 만주, 안산을 폭격하고 유황도, 오끼나와에 미군이 상륙한 것도 알게 되었다. 눈 앞에 일본의 패망이 보였다.

    일본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았다. 드디어 ’45년 8월 7일, 소련군 전투기 편대가 벌떼처럼 공습을 해왔다. 일본인 피난민들과 후퇴하는 군대의 대열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인심 좋은 한국 사람들은 패자인 그들에게 친절했다. 일본인들은 대접만 받으면 깍듯이 절하고 일본 주소를 적어 주었다. 콩 볶은 것을 자루에 넣어 차고 그걸 먹으며 험난한 피난길에 오른 일본인들의 대열은 어디서나 군대처럼 질서가 있었다.

    내가 있던 마을의 평야를 가로질러 후퇴하는 일본군 사단병력과 삼십여 대의 전차를 가진 소련군 부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는데 마을 대표들의 특별교섭으로 일소(日蘇) 양군은 두 가지를 합의했다. 그것은 30분 동안 휴전하고 농민들이 토성 안으로 들어가게 할 것과, 토성 안에는 포탄 피해가 없게 하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토성의 성벽 위로 머리만 내밀고 영화구경하듯 지켜보았다.

    일본군은 차라리 전사를 원하는 듯했다. 숨어서 망을 보고 있다가 무수히 쓰러지는 일본군 시체에서 옷과 소지품을 벗기던 아낙들이 성난 일본군에게 난자당하기도 했다. 드디어 소련군 삼백 명이 마을로 진주했다. 대장은 대위였다. 일본인 검색과 일본군의 무장해제, 공산당 선무공작이 임무였다. 그런데 죄수 군인들이 퍼뜨린 소문에 걸맞게 그들은 문자 그대로 짐승이었다. 강간과 약탈, 정글을 포효하는 짐승떼들처럼 보드카에 취해 초점없는 충혈된 눈빛으로 기분 내키는대로 총을 쏘고 강간했다. 여인 중에는 공포에 질려 자진하여 몸을 제공하기도 했다. 팔뚝마다 시계를 수십 개씩 차고, 들쳐맨 밀가루 부대에는 목침덩이 같은 빵과 짜게 절인 돼지고기, 고등어가 들어 있어 무시로 잘라 먹으며 여자사냥, 약탈사냥을 했다.

    여인들은 누구나 남장을 하고 최대한 추안(醜顔)으로 변장했지만, 소련군들은 여자의 연령도, 미모도, 장소도 가리지 않고 거리 한복판에서도 공포를 쏘며 윤간을 했다. 보다 못한 목사님들은 의논해서 누구든지 강간당할 각오를 하자고 했다. 대장인 대위만은 영어로 말이 통했다. 그는 인 장로님 집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마을 처녀들을 집단 수용해놓고 보호하겠다고 했지만 밤이 되면 그도 맹수로 변신하곤 했다.

    패자인 일본인들은 더 비참했다. 도처에서 가족 혹은 몇 사람 단위로 자폭해 죽은 시체더미들을 볼 수 있었다.

    너댓 살 난 일본 남자애가 “엄마가 아파요, 밥을 좀 주세요.”하고 마을에 들어왔는데, 등 에 커다란 편지를 차고 있었다. “이 아이는 이제 고아입니다. 엄마는 윤간당해 자살을 합니다. 한국인 아들로 키워주십시오. 혼백이라도 보은하겠습니다.” 애절한 유언이었다. …스물두 살 났다는 아름다운 일인 양가집 처녀가 강간당해 쓰러진 것을 한국인 노총각이 자기 농막에 데려다가 정성껏 보살핀 인간애에 감동되어 “받아만 주신다면 한국인의 아내가 되겠다.”고 사정했다. 3일 간 한국말을 연습한 후 그 처녀와 노총각의 청으로, 아버지같은 마을 어른들을 청해서 음식을 대접하고 한복을 입고 무릎을 꿇고 절하며 “일본인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저를 한국인의 아내가 되게 해주십시오, 착한 아내가 되겠습니다.”했다.
    한국 농사꾼 총각의 아내가 된 것이다.
    나는 어느 날 목단강에 나가서 교회지도자들 틈에 끼어 서울의 방송을 듣다가 KGB에 끌려 갔었는데 그때 한국인 출신 소련군 여자 중위가 밤에 와서 풀어준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8.15 해방이 되자 나는 소달구지를 하나 샀다. 소련군이 여자들을 강간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디론가 데려가버리는 판에 나는 약식 결혼식만 마친 아내를 데리고 약탈과 강간과, 죽음이 도사리는 수백리 피난길을 떠나온 것이다. 소달구지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나오는 이 피난길은 연옥의 길, 나의 25시였다(좁은 지면에 차마 다 쓸 수 없다). 특히 왕청 도문 간(間) 백 리 협곡에는 소련군이 매복해 있다가 비행기와 전차와 보병이 후 퇴하는 수십만 일본군을 독 안에 든 쥐를 잡듯이 협공하여 전멸시켰는데, 썩는 시체더미 위를 소련군 트럭이 질주하면 마치 흙탕물 튀기듯 송장물이 튀겼다. 협곡이라 그런지 시체 가스 때문에 그 곳을 지날 때면 코피가 마구 나고 구토를 했다. 소련군이 오면 여자들은 풀 속에 숨어야 했다.

    정글의 맹수들이 포효하는 밤에 어린이가 내 살 길은 엄마밖에 없거니 하고 엄마 품에 매미처럼 바싹 매달리듯 나는 주님 품에서, 그 눈동자 속에서 영원한 첫사랑을 연습했다. 일본만 망하면 민족수난의 긴 터널이 끝날 줄로만 알았더니 사실은 해방이 문제의 시작이고, 더 긴 또 하나의 터널의 시작이었다.

    - 김준곤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