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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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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는 모두가 그렇게 살았다"

    열 세 살에 서울로 상경한 함경도 북청사람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난 내겐 고향이 없다. 방학이 되고 명절이 되면 나도 여늬 사람들처럼 가보고 싶으나 갈 곳이 없이 산 사람. 더구나 그것도 새파란 스물 다섯의 나이에 당당한 걸음으로 고국을 떠나 실향민이 되어버려, 나이 그리고 주름살과 더불어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간절히 돌아가고 싶으나 갈 곳이 없는 사람에게 있는 마음의 고향. CCC란 내게 그런 곳이다. 정동회관을 떠난 지 이미 30년이 되어간다. 그러나 마음의 고향으로 CCC는 항상 늘 어디엔가 내 속에서 숨쉬어져 왔다. 없는 것 같으나 있는 것. 그래서 CCC 출신을 만나면 반갑고 정다왔고 그곳엘 가면 누군가가 나를 반겨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는 그곳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일생의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아왔고 동료를 만나 신앙을 나누어 왔다. 미국에 와 한 교회에서 모시고 섬기던 목회자도 CCC에서 만난 분이었고 그곳에서 만난 분들과 미래를 함께 갈 사역을 펼치며 어린아이같이 좋아했고 그곳에서 함께 자라 선교사가 된 분들을 도우며 살아가고 있다. 주님도 만나고 아내도 만나고 스승도 만난 곳. 그리고 친구도 만난 곳. 그래서 그 CCC를 도우며 함께 나이를 먹어 가는 것이다.

    젊은 곳. 늘 푸르른 곳. 돌도 그곳엘 서면 통성기도를 하는 곳. 심장과 심장이 만나는 곳. 히틀러도 그곳엘 왔었으면 예수를 믿었을 곳. 고등학교 1학년 때 하이 CCC로 시작해서 재수하던 시절을 지나 대학을 마칠 때까지. 내 인생의 누구와도 무었과도 바꿀 수 없었던 시절을 나는 그곳에서 보냈다. 윤남중목사님, 윤두혁목사님, 변한규목사님, 홍정길목사님, 하용조간사님, 문영탁간사님, 성백문간사님, 정정섭회장님, 두상달회장님, 강용원간사님, 김정복간사님, 김철해, 홍정식, 김지철, 김신희, 창해형, 봉석이형, 홍정표, 정민영, 박영율간사님 그런 이름들이 낮익은 이름들이다. 김준곤목사님을 처음 만나뵌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영락기도원 수양회 때였고 처음 들은 설교는 "쓰레기 속에 핀 장미"였는데 제목이 주는 통속성과는 달리 그것은 한편의 문학소설처럼 그렇게 아름다웠다는게 지금까지의 내 아릿하고 스위트한 추억이다. 나는 대학교 일학년때 입석에서 들은 목사님의 설교 '나를 바라보는 사랑의 눈동자' 때문에 다시 태어났고 텐스탭 입문편에 걸려서 지금도 이 어려운 길을 간다(사실 예수 믿는 사람의 가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그때는 모두가 따스했다. 모두가 뜨거운 피를 가졌었다. 매서운 겨울 바람을 피해 불광동 수양관 이불 속에 다리를 가즈런히 넣고 나누던 대화도 따뜻했고 흰눈 쌓인 수원 농대, 민족 복음화를 위해 먼저 농촌을 복음화 하자고 쩌렁쩌렁 울이던 정정섭 회장님의 기도는 피를 토하는 듯 했었다. 외양과 형식은 비끼어 놓고 대전 민족복음화대회를 위하여 전국을 누비던 홍정길 목사님의 뒷주머니엔 칫솔 하나가 평시에도 늘 달랑 꽂혀 있었지. 왜냐구요? 늘 언제든지 부르는 곳엔 달려가야 했었으니까. 언제 어느 곳에서나 만나면 두손을 꼬옥 잡고 우리 기도하자. 간절한 하용조 간사님의 기도소리는 언제나 젖어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고 그렇게 전도했고 그렇게 사랑했다. 그곳엔 형식은 이미 거추장스러운 덧 옷이었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무었을 말해야 하는지를 알았으니까. 여름 두달동안 미쳐 완성되지도 않은 회관에서 민족복음화요원 강습회를 한다고 먹고자던 시절 그때는 모두들 깔고자던 그 스폰지 방석겸 이불에 배인 퀴퀴한 땀냄새도 사랑했었다.
    토요일 오후 사직공원. 누구에게 예수를 전해야하는지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성령이 먼저 가르쳐 주었고 마귀는 더 이상 싸울 힘을 가질 수가 없었던 때. 만나는 사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를 영접하던 시절. 처음 만난 아저씨와 두손을 마주잡고 간절히 기도하면 그들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던 이 기막힌 추억들이다.

    작은 거인 CCC의 빅맨. 강용원 간사님. 한국에선 요즘 한국일보의 장명수씨가 유명하시다는데 어찌 그에 비할까? 그리스도라는 이름 하나 때문에 평생을 명예도 이름도 버린 그 어른이 기존 멤버도 없고 척박한 산골 진주로 좌천(?)되어 가 그곳에 홀로 틀어박혀서도 주님 이름만 붙들고 신들린 사람되어 젊은의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일. 그분에게라고 왜 아픔이 없었겠는가? 대전 집회, 무슨 여자 고등학교였던가? 경남팀이 숙소인 그곳에 장사진을 친 젊은 일꾼들을 보며 그래 이제는 누구도 범치 못할 관록대신 그분의 손바닥에서 난 주님의 핏자국을 보았었다. 그때는 모두가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모두가 행복했다. 아마 지금 나이들고 장성하고 관록이 붙었을지라도 CCC만은 여전히 그러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람들이 한국의 위기를 말하고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하고 유자격자가 부족한 한국선교의 위기를 말한다. 사치스러운 교회당을 지적하고 목회자의 권위주의를 공격하고 배부른 교인들의 거품을 한탄할 때마다 두고온 고향의 CCC가 생각난다.

    지난 2월, 추운 날씨에 IMF시대라고 사람들 마음마저 움츠러든 서울을 일년만에 갔다 오면서 생각한다. 벼랑끝에선 내 어머니의 나라는 여전히 나의 짝사랑 CCC가 정신사의 강을 바꾸는 대역사를 일으킬 것이라고... 고향의 형제들은 지금 이 일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조경요 장로, 연세대 정치과, HCCC4기, 미주사역 전문인 간사-

    - 조경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