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2024년 09월 16일
예수프론트라인

예수칼럼:현대적 고전으로 읽히는 최장기 베스트 셀러!
4영리에 대하여 들어보셨습니까?
양치는소리:인터넷 선교원 후원이사 목사님들의 글모음
비전이야기:우리들의 이야기, 독자들로 부터의 글모음
박광택의 탕자! 탱자!
선교마당:선교사로부터의 편지, 선교지소개 등 선교에 관한 글모음

각종 자료 연결
영원한 명시

교회-단체연결

Vision2000

김준곤 예화모음

박성민의 성서보기

경제전망대

천일웅 변호사 이민법 칼럼

인터넷이모저모




동아일보
전자신문
조선일보
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한국일보
미주한국일보
한겨레신문
라디오서울USA
The New York Times



  • “교회 언어, 바로 알고 쓰자!”

    음서를 읽을 때마다 감탄하는 것은 거기에 인용된 예수님의 말씀들 때문이다. 예수님은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를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정확한 어휘와 예화를 통해 설명해 주신다. 구원의 비밀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깨닫게 하시려는 주님의 깊은 배려를 엿볼 수 있다.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종교가 무엇인지를 보면 사회의 문화를 가늠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국민의 20% 이상이 기독교인인 우리 나라에서 기독교 문화가 사회 문화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필자는 문화 형성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언어’를 들고 싶다. 인류 역사상 훌륭한 문화를 이룬 민족에게는 언제나 잘 다듬어진 언어 문화가 있었다.

    잘못된 말은 잘못된 문화를 낳을 수밖에 없다.
    기독교가 사용하는 언어를 연구하지 않고 기독교 문화, 교회 문화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 어느 종교보다도 ‘말’을 중시한다. 잘못된 말은 잘못된 문화를 낳을 수밖에 없다. 농담 같지만,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예수를 잘 믿으라고 가르치는 교회와, 천국에 가려면 예수를 믿으라고 가르치는 교회의 신앙관이나 문화는 서로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설교 중 담임 목사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무엇인지 가려 보면 그 교회의 신앙 문화의 근간을 엿볼 수 있다. 또 교회 지도자가 언어에 담긴 깊은 의미를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구사하는가로 그 교회의 문화 수준을 가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 내에는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언어 문화가 분명히 있다. 언어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비록 교회의 언어 문화라 할지라도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 많거나, 어떤 말이 교회 밖에서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인다면 바른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심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깨닫고 남에게 설명하고 전하기 위해서는 목회자들이나 지도자, 먼저 믿은 이들이 정확한 언어 구사 능력을 체득해야 한다.

    나이가 많은 한 유학자가 교회에 나왔다. 몇 달을 다닌 후 그는 목사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교인들은 대단히 무례하다. 아들도 손자도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니 촌수가 엉망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었다’라고 하고, 하나님을 감히 ‘당신’이라고 부르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나’라고 한다. 세상에 이렇게 몰상식한 사람들이 어디 있는가?”

    성경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장) 또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벧전 4장)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서 잘못된 언어가 사용됨으로써 기독교의 진리가 왜곡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오류를 고쳐보려는 의식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부정확한 말을 사용한 예들을 모아보았다.

    “하나님, 우리 기도를 들어 주소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나’나 ‘우리’로 표현하고 있다면 ‘저’나 ‘저희’로 바꾸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 축복해 주시옵소서. 축복을 주시옵소서.”: ‘축복’은 복을 빈다는 뜻이다. 이삭은 하나님께 야곱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기도했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해준 것이다. 이것이 축복이다. 따라서 “하나님, 축복해 주시옵소서”라는 말은 황당한 말이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해야지, 축복을 해달라고 하면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에게 복을 빌어 주어야 하는가?

    “하나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이라는 말은 세 가지로 쓰인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러는 거요.”의 경우, 상대방을 얕잡아 일컫는 제 2인칭어로 쓰인 것이고, 그 자리에 없는 웃어른을 높여 일컬을 때는 제 3인칭 대명사, 부부 간에 서로 상대방을 일컬을 때는 제 2인칭어로 쓰인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거나 찬양을 하면서 “당신을 찬양합니다”라고 하거나,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얕잡아 일컫는 제 2인칭어로 본의와는 달리 무례한 기도와 찬양이 될 수도 있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자신의 선생님의 성함이 ‘김철수 씨’라고 하자. 그 선생님을 “철수! 철수! 귀한 철수!”라며 아이들 이름을 부르듯이 함부로 부를 수 있을까? 외국 찬송가를 직역한 데서 온 오류라고 볼 수 있다.

    “전능하신 자여, 우리를 기억하소서.”: ‘자’가 무슨 ‘자’인가? “전능하신 이여”가 좋다. ‘우리’도 ‘저희’가 옳다. 이같은 표현은 교역자를 초빙하는 광고문에서도 볼 수 있다. ‘신학 대학원을 졸업한 자’와 같이 무례한 표현을 별 생각 없이 쓰고 있다.

    “당회장님께서 설교해 주시겠습니다.”: ‘당회장’은 당회를 할 때 호칭이고, 설교할 때는 ‘담임 목사’라고 불러야 옳다. 예배는 회의가 아니다.

    ‘목사’와 ‘부목사’: ‘목사’라는 말은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와 같이 계급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신분을 의미하는 말이다. 안수를 받는 순간 목사가 되는 것이지 ‘부목사’를 거쳐 ‘정목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교역자’라는 말은 몰라도 ‘부목사’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성령화’: ‘복음화’라는 말은 몰라도 ‘성령화’라는 말은 퍽 조심스러운 표현이다. 사람은 ‘성령화’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사람이 성령화의 주체가 된다면 그가 성령보다 전능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시간이 되었으므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말은 시간이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예배를 시작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냥 시작하면 된다.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주기도문이나 축도가 폐회용은 아니다. 다음 순서를 위해 어떤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설교를 위해 성가대의 찬양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성가대의 찬양에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공중 기도를 생각해 보라.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함께 기도 드리는 것인가? 기도도, 찬양도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찬양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이다.

    “주여”: 아버지를 향해서 “아버지여!”하고 부르지 않는다. 선생님을 “선생님이여!”라고 부르지 않는다. “주님!”이 적합하다.

    “할렐루야!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할렐루야’는 ‘Good morning’ 같은 인사말이 아니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제 2인칭으로 하여 기도와 찬양에서 쓰여야 한다. 인사말로 남발되는 것은 옳지 않다.

    “특송해 주시겠습니다.”: 찬송에 ‘특별송’이 있고 ‘일반송’이 있을 리 없다. 모두 ‘찬송’ 또는 ‘찬양’이라고 하면 된다.

    “준비 찬송 223장을 부릅시다.”: 찬송으로 뭘 준비한단 말인가? 찬송을 드리는 순간 이미 예배는 시작된 것이다

    ‘대예배’: 예배에 큰 예배 작은 예배 따로 있는가? 한두 사람이 모여도 ‘예배’다.

    “황무지가 꽃 피니”: 황무지가 어떻게 꽃을 피우겠는가? “황무지에 꽃 피니”가 맞다.

    “세례 요한”: 베토벤을 ‘음악 베토벤’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음악가 베토벤’과 같이 ‘세례 요한’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이 맞다.

    이의용·중앙대 광고홍보학과 강사, 교회문화연구소장

    - 이의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