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서신 - Jul 5
만유위에 뛰어나시고 크신 하나님의 은총이 삶의 자리마다 넘쳐서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십자가 아래 묻어져버린 "넉넉히 이기느니라"의 승리가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지난 주에는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알고 찾으려는 노력은 그것이 비록 과학적일지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것이요, 그 노력이 정직하다면(사교적이거나, 주술적이거나, 독선적이 아니라면) 실수가 있을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넉넉히 기뻐하시고 품으심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알고 찾는 과정에서 생겨난 실수를 걱정하여 그것을 억압하고 교리라는 틀로 제한(control)하는 것, 즉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지켜주어야만 된다는 생각이야말로 가소로운 것입니다.
욥기 13장에서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닥친 재앙을 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더 유익인지 더 잘알므로 재앙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은 신성모독의 죄라고 경고함으로 설명을 합니다. 이때 욥의 대답은 통렬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궤휼을 말하려느냐? ..........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욥 13:7-9)
욥의 친구들은 자네는 하나님을 놓고 불경스러운 말을 하고 있다고 경고하지만 욥은 대답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진정으로 예배할 가치가 있는 분이라면 나는 그 분이 나의 정직함을 자네들의 아첨보다 높게 평가하신다고 믿네. 하나님은 내가 자신이 듣기 원하는 말을 진실없이 입술로만 말하기보다 나의 진실을 더 기꺼이 들어 주심을 확신하네." 그렇습니다. 진정한 체험과 가슴의 우러남이 없는 즉 삶이 뒷받침 되지않은 교리적 세뇌로 인한 억만마디의 입에 발린 말보다, 좀 부족하여도 때로는 하나님께 불경하게 보이는 항의가 될지라도 우리의 진실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더 귀하게 받아주십니다. 바리세인의 신학적으로 꼭 맞는 그 무수한 말보다 세리의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를 더 기뻐받으셨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고백의 중심이 확실하다면 교리적 정답권 내에만 안주하려는 온실 안의 나약함에서 삶의 진실 자체를 수용하려는 광야의 거칠음을 향해 나아가고 열려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 안에서의 나눔이나 발언도 얼마나 교리적으로 맞는 말을 하느냐가 관점이 아니라 얼마나 정직한 영혼의 고백이 나누어지느냐가 관점이 될 때 교회는 종교단체가 아니라 삶을 나누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 점에서 한국교회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조금만 부흥하는 듯 잘되는 듯하면 교권을 쥔 자들이 '이단'이라는 칼로 싹을 잘라낸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다가 상대가 힘이 더 커지면(조ㅇㅇ목사님 케이스처럼) 이단이라는 시비를 슬며시 거두는 비열한 짓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버젓이 해왔습니다.
삼주간에 걸쳐서 보수-자유, 정통-비정통 등 교회 안의 비생산적 논쟁에 대하여 나눈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우리 스스로 교리적 정답을 만드는 교회가 아니라, 우리가 진실함으로 나눌 때 하나님께서 그 나눔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교리적 전문가가 인정받는 교회가 아니라 삶의 진실을 나누는 영혼을 감싸안아주고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세워주며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되시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교리보다 삶의 진실을 가꾸기 원하는 종 이학권 드림
- 이학권 목사 (뉴욕 새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