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 해방의 영
목회서신 2-7-99
성경에서 성령이란 단어가 많이 나타나는 로마서 8장은 성령님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결론짓는다.
시작 : 1, 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결론 : 31절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4절 누가 정죄 하리요
37절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9절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해방과 하나님의 사랑과 승리에 대한 확신은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인 것이다. 그간에 교회 내에서는 성령님의 본성과 본질적 사역은 외면한 체 종교적 현상과 무속적 신심만을 강조한 성령의 이해가 많았던 바, 몇주에 걸쳐 성령임은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시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삶의 불쌍함은 자아(self)의 경직에 있다. 우리의 자아는 본질적으로 방어적이다. 우리가 생명으로 잉태되어지는 그 순간부터 엄습하는 두려움(모든 세계가 미지이므로)과 수치감(내 모습 이대로로는 사랑받을 수 없다는)으로 인한 상처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하여 만드는 보호껍질(성경에서는 나뭇잎치마)의 켜들이 나의 성격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보호껍질들에는 선한 면도 있으나, 그 선함은 자신을 보호하거나 위장하기 위한 선이므로 본질적 선이 아니다. 성경에서 의인은 없다거나 또는 선한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선언들은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이러한 방어적 자아의 특징은 불신이다. 세상 어느것도 나의 자아가 원하는대로 되어있는 것도, 되는 것도, 될 것도 없기에 우리는 모든 것에서 상처를 경험한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을 직시직면하는 것을 피하고, 가능한한 내 능력 한도 내에서 현실을 나의 자아의 의도대로 조정할려고 한다. 그 조정의 수단으로 재력, 명예, 권력, 인기 등이 쓰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제한적이므로 결코 우리에게 온전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진정한 만족(안식과 평강과 희락)은 자아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현실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관계할 수 있는 자유를 체험할 때에만 오는 것이다. 삶의 진정한 승리는 바로 자아의 해방이다. 반대로, 자아를 자기가 만든 감옥에 가두고 그 속에 경직되어져서 진정한 용납도 사랑도 연대도 경험하지 못하는 삶이야 말로 가장 불쌍한 삶인 것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아를 쌓고 강화해나가므로 이 자아의 해방은 우리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아래로 흐르는 물이 스스로 위로 흐를려는 것이나 같다. 물이 위로 흐를려면 외부의 힘이 가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의 헛점은 우리는 물 같은 비인격체가 아니라 인격체인 데에 있다. 따라서 본능적으로 자아를 강화하는 우리의 삶에, 자아를 해방하는 외부의 힘은 감동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 외부의 힘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성령님이며, 성령님은 우리의 심령에 감동하사 자기중심성의 자아를 열고, 생명의 본래 모습인 사랑(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한다. 이것이 스스로 죽으나(자아의 죽음) 진실로 사는(진아의 살음) 십자가의 비밀이기도 하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불신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의 마음에 십자가의 사랑의 감도을 주사 닫힌 자아를 넘어 우리로 마음의 문을 열게한다. 이 열림이 곧 믿음이다. 즉, 마음의 문을 열 때에, 나로서는 알 수도 없고 조종이 불가능한 세계를 직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가 근본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의 창조요, 그 하나님의 주관하고 인도하고 계시며, 그 하나님께서 완성하신다는 믿음으로 여는 것이다. 결국 믿음은 성령님의 선물인 것이다. 믿음 외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때로는 우리의 자아의 욕구를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그 때는 그 믿음은 우리의 의지의 반영이지, 결코 하나님 안에서의 열림은 아니라 바른 믿음이 있는 곳에는 이러한 열림(가면벗음, 교통함, 하나됨 등)이 반드시 체험되는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가 시작되면 내가 나를 세우고, 주장하고, 증명해 보이는 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의 해방이 반드시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확실한 성령내주의 증거이다.
- 이학권 목사 (뉴욕 새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