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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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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됨의 실천적 원리"

    (빌립보서 2장 1~11절)

    현대 정신 무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고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근래에 와서 대화·만남 등이 부각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날이 가면 갈수록 인격적인 만남보다는 돌멩이와 돌멩이, 토치카와 토치카의 만남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만남의 극치는 결혼에 비유할 수 있는데, 인격이 서로 통하여 하나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적이 통하고 마음과 뜻이 통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제5장에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적 연합을 결혼을 비유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코이노니아란 성삼위의 사랑의 교제를 의미하는데 그것이 곧 대화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시는 것을 계시라고 하는데, 자연을 통해서 나타내시는 일반계시와, 성서와 예수와 예언자들을 통해서 나타내시는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하신 그 하나님, 로고스의 하나님이십니다.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이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시고, 그 말씀으로 된 것이 성경입니다.

    이 말씀이 성령에 의해 해석되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기도와 믿음을 통해서 계시하신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사랑의 영으로 나타나신 분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장소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가 그 부르심에 대답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이고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하나 되게 하는 영입니다.

    하나님의 언어는 두 가지인데, 나타난 언어와 나타나지 않은 언어, 즉 사상이 있습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사의 표현과 전달 방법은 다양하고 폭이 넓습니다. 언어의 고저장단과 희노애락의 감정에 따라 효과가 달라집니다. 또한 기호·그림·숫자·암호 등으로 나타내기도 하며 최근엔 컴퓨터가 언어 전달을 맡기도 합니다. 행동이나 표정으로도 말할 수가 있는데 수화나 죽임, 자살 등도 포함됩니다. 어떠한 방법으로 전달되어지든간에 의사 전달은 수용자의 해석상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왜곡과 변질이 포함되기도 합니다.

    현대의 중요한 문제는 대화에 대한 해석의 문제입니다. 부모와 자식, 부부 사이, 노사관계, 사제관계, 문화와 문화 사이, 예술과 예술 사이, 하나님과 삶 사이에 오해와 편견과 대화의 막힘으로 무서운 문제가 야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화와 언어 전달과 이해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대화의 단절로 불화·살인·전쟁이 야기됩니다. 카인 문화의 후예에게 과연 대화가 있을까요? 신학적으로 볼 때 인간은 대화가 없습니다. 인간 모두가 각자 하나의 절대자입니다. 자신이 신이고 왕입니다. 목적이 자아이고, 수단이 자아이고, 자기가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세상엔 진정한 대화의 광장이 없습니다. 대화의 바탕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자신이 변화를 받지 않으면 토치카와 토치카처럼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들어오시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수직과 수평, 노사 문제, 빈부와 유·무식 등의 담을 허는 화해자이신 예수의 복음이 없이는 인간에게는 진정한 대화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간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갖기 위한 몇 가지 실천적 원리를 소개하면, 1. 내가 남의 도덕적 재판관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거의 예외없이 모두가 재판관이 되어 있습니다. 형무소 안의 사형수끼리도 서로가 서로의 재판관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편적이고 편견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합니다.

    2. 우리는 도덕적으로 모두 불완전합니다. 무르익은 인격일수록 고개를 숙이고 도덕적인 겸손을 배웁니다. 간음한 여인을 잡아 놓고 종교적 분노로 모두가 돌로 치려 합니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예수는 그녀를 정죄하지 않는데 불완전자가 정죄하고 있습니다. 간음자가 간음자를 다스리고, 도둑이 도둑을 다스리는 현대의 도덕적 아이러니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도덕적 재판장이 될 수 없습니다.

    3. 절대 사랑을 가진 자만이 완전한 심판자가 될 수 있는데, 절대 사랑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을 가진 자만이 판단할 수 있습니다. 탕자의 형은 정의로 동생을 다스렸지만 그의 아버지는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탕자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그 죄를 자기의 죄로, 그의 고통과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했습니다. 그 아버지만이 탕자를 심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랑의 표준이 없는 사람은 남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소유물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우리 마음대로 판단할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4.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의 어전에서 살았고, 광야생활을 할 때는 성막에 그 분이 계셨습니다. 솔로몬 이후에는 성전에 계셨으며 예수님이 오셔서는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계셨습니다. 승천 후에는 성령으로 그리스도인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를 모독하는 것은 성전을 모독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다른 이의 인격을 모독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대하듯 해야 합니다.

    5. 하나됨의 표준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표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쓸모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두가 필요합니다. 모두가 지체이며 중요합니다.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해 주십시오. 사랑의 충고를 하되 겸손한 태도로 하십시오. 끝까지 믿어주고 용납해 주십시오.

    6. 성령 안에서의 일치가 곧 완전한 사람으로서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중요한 낱말 중의 하나는 ‘불구하고(in spite of)’입니다.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용납함을 받았으니 나도 남을 그대로 용납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불완전하고 죄 있는 그런 사람들을 용납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휴머니즘의 혼란시대가 왔습니다. 평화회의는 좌절할 것이고, 유엔은 딜레마에 빠질 것이며, 아마겟돈 전쟁이 그 종국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 이후에 인간의 구음을 혼란케하신 이후로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고 성령으로 하나 될 때까지 인간의 대화는 단절되었는데,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구음이 하나가 됐습니다. 15개 나라의 방언으로 말했는데 이것은 성령 안에서 언어의 장벽, 인종, 국경, 남녀, 빈부, 이데올로기의 장벽을 꿰뚫고 하나가 되고, 사랑할 수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우리 민족 최대의 소망은 복음화된 통일한국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시급한 과제는 영호남의 하나됨과 동서가 화합하는 일입니다. 하나됨을 위해 여러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길 바랍니다.

    - 김준곤 목사 (한국대학생선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