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길 찾은 자 뛸 필요가 없다.
필자는 한국의 기업 자문을 위해 여름 3개월, 겨울 1개월등 1년에 모두 4개월 정도 한국을 방문해 왔다. 지난해 겨울 생각하기도 끔찍한 IMF가 한국을 강타할 때는 기업을 자문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공범이 된 것 같은 죄책감을 느꼈다. 다행히 필자가 자문했던 회사들은 IMF 하에서 겨우 약간의 이득을 냈지만 이 위기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많은 회사들과 직장을 잃은 직원들과 가족들에게 향하는 애처로운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
지금 한국 기업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벌하다. 옛날에 "너 아직도 미국에 있냐?" 라고 묻던 친구들이 요즘에는 나를 부러워한다. 헤어지면서 인사가 늘 "집으로 전화 해라. 회사는 언제 잘릴지 모르니까." 이다. 장난기 있는 인사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현실이 불안하다. 4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이 가장 전전긍긍한다. 자녀들이 대학교를 갈 나이라 돈이 많이 드는 중요한 시기이며 가장 왕성하게 일할 나이가 아닌가? 중 소기업은 살아남은 것이 도리어 이상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대기업은 부장, 임원이 가장 위험한 자리이다. 젊은 대리, 과장들도 불안한 부장과 임원 밑에서 엄청난 심적 시달림을 받고 있다. 이 시기에 직장을 찾은 사람을 일러 "가문의 명예"라고 말할 정도가 됐다. 바꿔말하면 직장을 잃는 자는 그야말로 "끝장"이다. 그래서 살아나기 위해 상사의 손가락 하나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이제 국가적 차원에서 "다시 뜁시다" 라는 슬로건을 걸고 국민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려 하고 있다. 태극기 사랑운동이 일어 사방에 태극기를 달고 다닌다. 태극기 를 들고 부지런히 뛰자는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오후 6시만 되면 불을 끄고 강제 로 퇴근하라고 하더니 이번여름에는 6시에 퇴근하는 사람은 구조조정대상 1호가된다 고 믿어 서로 눈치만 보고 남아있다. 하루는 저녁 10시까지 사무실에서 일하고 나가 려고 문을 연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직원의 반 이상이 임원이 퇴근한 뒤인데 도 불구하고 남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 요즘은 직장인 남편을 가진 주부들도 남편이 일찍 오면 가슴이 철렁한다고 한다.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와야 안심이 된다.
한국에서의 여름업무를 마치고 미국직장으로 복귀하면서 마음이 착잡했다. 왜 똑똑 하고 우수한 한국인들이 이리도 뛰어야만 하는가? 좀 모자라 보이고 원칙주의로 꽉 막힌 미국인들은 느긋하게 살아도 괜찮은데. 아직도 생각하는 방법이 옛날 그대로이 고, 구체적 방법을 자기들도 모른 체 "뛰라"고만 해야하는 정부와 기업임원들이 우 리 국민을 더욱 혼란스럽고 서글프게 한다. 우리민족이 계속 뛰다가 얼마나 사고를 많이 냈던가? 방향도 모르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나온것이 한보사건이고 IMF인 데 또 뛰기만 하라니! 이제 그만 뛰고 조용히 앉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바른 길"을 찾은 사람은 뛰지 않아도 된다.
- 이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