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八福)과 기독아(基督我)
목숨보다 소중한 한 애인에게 인생 전체를 걸었던 한 천애(天涯)의 고아가 있었다. 그의 애인은 그의 신이며, 천사이고, 조국이며, 열 개보다 귀한 목숨이고, 소망이며, 모든 것의 모든 것이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죽었다. 텅 빈 하늘 아래 남겨진 인생, 아무 것도, 아무도 없다. 죽음보다 창백한 인생. 허무하다. 전체를 주고 전체를 박탈해갔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 없는 인간의 잠재 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자신도 모르는 또 하나의 진짜 참 나의 상심한 영혼의 상태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에 의해 만들어졌고, 예수 안에서 살도록 만들어진 사랑의 피조물이다(골 1:16-17). 그 예수 상실의 자각이 가난한 심령, 예수 상실의 슬픔의 자각이 애통하는 마음, 그를 만난 온유, 그를 목말라하는 사모, 그의 긍휼, 그의 청결, 그 때문에 받는 박해, 나도 모르게 닮아버린 예수.
거지 고아를 왕자 삼은 경우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은혜로 우리를 자녀 삼으신다고 약속한다. 그것이 복음이다. 율법이나 선악의 양심 법정에서 우리 모두는 형사 법정의 죄수일 뿐인데 예수 안에서는 그의 의(義)와 신분을 바꿔 입혀주신다. 사납고 더러운 귀신들린 거라사인처럼, 꿈 속의 망령처럼 상심한 이방인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현대 탕자들이여! 이제는 제 정신이 들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
생명은 무상(無償) 선물이다. 생명의 주를 믿으라!
-예수칼럼 : 김준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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