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펴낸 김준곤 목사님의 "딸의 죽음, 그 존재의 제로 점에서.."의 CD를 함께 다시 듣고, 이 가을의 인생사색(人生思索)이 더욱 풍성해 지기를 바라며 이 글을 드립니다.) "5천만의 가슴 속에 이 한편의 CD멧세지를 새겨 드리고 싶습니다."
하얀 박꽃 소복(素服) 입고 피고 지는 흰 구름 흘러가는 하늘위에
이 한 편의 CD를 들어 보십시오.
한 인생의 하나 밖에 없는 생명, 두 번 돌이켜 살수 없는 생애에, 누구에게나 들려주고 싶은 멧세지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거칠고 바쁜 삶에 지쳐 감정이 메마를 때,
느낌마저 숨을 쉬지 않을 때,
삶의 의미가 희미해 져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인생이 목 마를 때, 실패하고 낙심 속에 있을 때,
심한 좌절로 죽고 싶을 만큼 외롭고 고독 할 때,
병실에서 두렵고 초조할 때,
이 한 편의 CD를 들어 보십시오.
모든 일이 너무도 잘 되고,
마음이 굳어져 철판을 깔고 살 때,
부드럽고 고운 심장까지 세멘트 콩크리트 돌이 되어버린 마음에도,
녹이 쓸어 버린 마음에도,
하늘 끝까지 교만이 치 솟았을 때도,
겸손한 인간의 제 모습으로 돌아 오도록
이 한편 의 CD를 꼭 들어 보십시오.
계획하는 일마다 원하는 뜻대로 너무도 쉽게 잘 풀려 가고 있을 때,
너무도 행복해져, 행복의 정상에 취해 있을 때,
인간의 본연의 제로 점에 서서 자신과 인생을 미리 보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
이 한 편의 CD를 꼭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전 생애를 바쳐 사랑과 생명, 비젼의 멧세지로 우리 세대를 깨우고 있는,
김준곤 목사님의 부드러우면서 날카롭고, 섬세한 필치로
고백처럼, 통곡처럼 나와 하나님, 생명과 그리스도, 죽음과 영원에 대하여
목사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인간이면서 성직자로서,
그리고 한 가족의 아버지로서, 절절한 눈물로 적셔 쓴 생명언어의 대화,
눈에 확실하게 보이고 손에 잡히는 희망의 멧세지가 담겨 있습니다.
고난을 서로의 것으로 나눌 줄 알고, 예수생명 사랑을 함께 전하는
귀한 분에게 꼭 드리고 싶은 한 편의CD 입니다.
들으신 후에 그리스도를 전하고 싶으신 친구들께도
들려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야 하는 인생의 마지막에 생명의 소중함을,
미리 알고 사는 후회 없는 예지(銳智)를 서로 함께 얻으면 좋겠습니다.
1998년 8월
박꽃처럼 하얗게 만 살고 간 김 신희 간사를 그리워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향기 나는 추억 속에 샘물처럼 솟아나는 그리움을 안고... ,
한국대학생선교회 미주사역
대표 강 용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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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석에 눕기 전 어머니 전효심 여사와 함께 두 딸을 데리고 나들이한 김신희씨,
정하와 수연이 자매는 어느새 수물한 살과 열아홉 살, 엄마를 닮은 어여쁜 숙녀로 자랐다.
1998.07.03 / 조선일보 / 문화.생활
[종교] "딸의 죽음…그날 이후 마음이 가난해 졌어요"
- 수기 펴낸 김 준곤 목사...투병-죽음 보는 신앙인의 내면 고백 -.
"16년 전 둘째 딸 신희가 위암으로 처절한 고통 속에 죽었을 때, 저는 존재의 제로 점에 서있 었습니다. 제 생애 가장 애절한 기도가 무참히 거절 당한 직후였지요.".
한국대학생선교회(C.C.C)총재 김 준곤(74) 목사가 얼마 전 음반으로 만든 '딸의 죽음, 그 존재 의 제로 점에서'가 신자들에서 비신자로 퍼져 나가면서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음반에는 29세의 나이로 암에 걸린 딸의 투병 1백67일을 지켜보는 아버지, 엄마 잃은 두 손녀를 5년간 키우며 가슴을 저미는 할아버지, 딸의 죽음으로 신앙을 다지는 목회자의 모습이 꾸밈 없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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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중이 26㎏까지 내려간 신희는 온몸에 바늘을 꽂은 채 극한의 고통에 몸부림쳤다. 몸을 뒤틀 며 이를 악물고 신음하는 딸애의 고통을 보는 것은 정말 감당할 수 없었다. 아비 된 자로서 12 번 딸의 죽음을 대신하고 싶었다.".
딸만 넷인 김 목사에게 둘째 딸은 유독 연약하고 착했던 '아이'였다. 유학간 남편을 뒷바라지 하다가 발병사실을 알았을 때는 말기 위암. 갖가지 치료를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 딸 이기 전에 주님의 딸이다. 이 세상보다 천국에서 더 필요하셔서 높이 쓰시려고 특별 고통 코스 를 거치게하여 불러 가시는 것이다." 김 목사는 신앙인으로 위안을 하기도 했지만 죽음은 다가 왔다.
"나는 방에서 모두 나가주기를 청했다. 둘이서 잠깐 동안이나마 있고 싶었다. 창백한 얼굴은 태풍 뒤의 호수처럼 잔잔하다. 꼭 붙들고 있는 신희의 손목이 서서히 굳어지며 차가워지고 있 음을 느낀다. 차츰 나는 언어도, 행동도, 존재 조차도 정지된 상태에 빠져들었다.".
김 목사는 나중에 하나님에 대해 자신이 처음으로 섭섭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갸냘픈 아이에게 이 가혹한 고통을…'.
남겨진 두 손녀가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처럼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당시 5살 난 정하는 엄마란 말을 입밖에도 꺼내지 않았으나, 3살 난 수연이는 엄마가 하늘나 라로 갔다니까 자꾸 하늘을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슬픔이었죠.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죽음, 사위에게는 아내의 죽음, 나와 내게는 딸의 죽음. 아무리 나누어도 가벼워 질 수 없었죠. 손녀들이 감싸주며 슬픔을 삭이는 모 습이 너무나 가여워서…".
90분 인터뷰 내내 노목사의 눈에는 눈물이 어렸다. "딸의 죽음이후 마음이 가난해졌고, 욕심이 없어졌어요." 죽음을 깨달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유일 것이다. 두 손녀는 LA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다.
* 이 준호기자juno@chosun 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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