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사람들은 지하철 출퇴근 길에 저마다 조간 석간을 사들고, 몰두해서 보는 것은 그날 탑 뉴스 사건이 아니라 스탁 마켓의 인덱스 변화를 본다. 아침과 저녁에 달라진 인덱스 수치(數値) 에 성취와 박탈의 하루의 수지계산을 해 보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숫자통계지수(指數)시대에 살고 있거나 놀아나고 있는지 모른다. 증권시장의 순간으로 변하며 돌아가는 전광판 숫자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해 주는 듯 하늘보다 통계 숫자에 목을 걸고 바라보는 세상이다. 한국에 숨겨둔 달러 한푼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매 일 인터넷을 열면 환률변동 숫자를 보고, 한숨과 희비의 습성이 생긴지 오래다.
지수는 수학용어로 쉽게 말하면 뿌리 수에 변수가 붙어 거듭제곱 누승, 또는 멱승, 제곱 승으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변수는 뿌리 수(數)에 거듭제곱(累乘)의 함수(函數)관계를 가지고 변화를 일으킨다. 이것이 생활 어가 된 것은 물가와 생활비 (Cost of Living)가 일상생활에 함수관계를 가지고 우리들의 날마다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정시간을 100으로 기준 하여 변화의 정도를 평균치로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상황판과 같다. 물가기준의 인덱스 넘 버(Index number)로 불리기도 한다. 이 계산법이 있기 때문에 복합적으로 얽힌 경제상황의 구 도를 평균하여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지능지수, 물가지수는 생활어가 된지 오래다. 최근 다른 지수들이 관심의 초점 이 되고 있는것은, 하도 세상이 빨리 변하고, 그 변화가 무쌍(無雙)하고 가랑잎 하나가 호수 전 체의 파문을 일으킨 처럼, 한 곳, 한 사건이 안방에서 전 세계로 그 변화의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더욱 확실해 졌기 때문이다. 지수가 통치하는 시대가 된 듯 착각을 일으키고 있다. 물가지수, 지능지수(IQ)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감성지수(EQ), 동기부여 지수(MQ), 도덕지수 (Moral Quotient) 새로 들어온 카리스마권위 지수(CQ)도 있다.
우리가 날마다 환경의 변화를 받 고 사는 습도지수, 건조지수도 있다. 불쾌, 불행 지수가 있는가 하면 행복지수도 있다. 자유지 수, 천국지수가 있는가 하면, 비참지수(실업율.인플레이션)도 있다. 인성(人性)의 부패지수는 환란지수와 비례하고 재앙지수를 증대 시킨다. 환란의 도미노(연대도산)는 개인의 아노미(자포자기)를 확산시킨다. 이것이 오늘 우리 한국의 현실이다.
'서울로 가는 귀성 길',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서울은 쉽사리 가까워 지지 않고 있다. -(지난 설날 귀경 길 교통상황을 알리는 헬리콥터로 본 서울의 교통체증보도에 재미있는 표현이 어떤 의미를 주고 있었다) - '가다 서다 정체현상을 반복하고 있는 한국의 현 상황'을 미국에서 보면 서, 더욱 더 멀어져만 보이는 서울이 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한국의 경제 환란이 왜 왔는가? 복합적 부패 인간 구조악이다. 무책임 했거나 무지와 회피에 인간 부패의 노출일 뿐이다. 밀어 닥치는 '글로발 스탠다드'에 이제는 더 이상 '한국식 스탠다드' 는 설 자리를 잃어 가는 상황인 것이다. 이제 우리들 만의 '따로국밥'은 없어진지 오래다. 밑이 안보이고 끝을 볼수 없는 사회전반의 구조적 부패의 무저갱 속이다.
설마 설마 조마조마 하더니, 혹시가 역시가 되어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계속 들어 나고 있다. 썩어도 그렇게 까지 깊이 있게 썩어버렸을까? 경제가 바닥 나기 전에 이미 인간성이 바닥 밑으로 제로점 이하 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경제환란은 사회구조속의 인간부패에 그 뿌리를 대고 있다. 결국 사람이 원인인 것을 다시 한번 확인 한 것이다.
치과대학 교수가 뇌물로 모은 돈으로 치부를 하고 학생을 가르친다. 썩은 이빨을 뽑아주는 치 과대학교수의 입에서 풍겨 나오는 악취의 구취 속에 서울의 공기는 아직도 코를 둘 곳이 없는 썩는 냄새로 가득하다. 판사는 변호사로부터 뇌물을 받아 챙기는 나라. 경제 모라토리엄을 보기 전에 인간 모라토리엄(성숙정지상태)을 보려면 한국사회의 계층적 구조적 부패성을 보면 된다. 그런 교수들 밑에서 배워 치과를 개업해서 뇌물 준 돈이라도 뽑아 낼 심산으로 환자를 볼까봐 그렇지 않아도 무서운 치과의사가 IMF 보다 더 무서워진 세상이다. 아직도 잠에서 덜 깬, 아직 도 취해 있는 비몽사몽 서울의 환락의 밤은 깊어 있다.
경제지수에 웃고 울기보다는 인간성의 야욕지수, 욕구지수, 인성지수를 생각해야 할 때다. 경제 지수를 만들고 있는 장본인은 인간 자신이기 때문이다. 정치, 교육과 법조계층만 썩어있는가. 인성(人性)을 고양시켜야 하는 종교계층은 어떤가. 결국, 인간이 바뀌어야 삶의 지수가 안정 될 것이다. 인간성을 책임진 종교인의 책임과 기대는 경제회생의 구제금융 보다 높다.
불란서 혁명이 일어 났던 1789년, 성난 군중은 루이14세를 처형하고 베루사이유 궁전을 부스고, 교회에는 돌을 던졌다. 민중의 신뢰에 배신한 빛도 아니고 소금도 못된 짓밟혀야 할 소금종교 였다. 그로부터 50여년 후 1848년 막스.레닌이 공산당 혁명을 일으켰다. 성서의 원리에서 하나 님만 빼어 버린 반항허구의 악령이였다. 혁명군은 종교논리로 갑론을박하고 있는 회의장을 습격해 박살을 냈다.
최근 각 언론의 인터넷 독자투고란은 차마 낯이 뜨거워 들어 가 볼수 없게 기독교를 질타하고 있다. 기독교 박멸운동을 벌리자는 글도 있다. 그들의 힐난만큼 그래도 기대를 걸고 있던 종교 였는지 모른다. 종교의 책임은 국정책임보다 높은 곳에 있다. 무디스와 S&P가 경제등급을 하향 시킨 것 보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책임 있는 한국의 종교인의 상향조정 인정이 더 시급하다.
우리 인터넷 홈페이지 방명록에 침통한 의미의 격려도 있다.
"아무리 세상이 꺼구로 가고 있을지라도, CCC대학생 젊음들의 싱싱하고 씩씩한 횡보를 보며, 우리는 아직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힘 내시기 바랍니다."
다시 힘을 내자. 그리고 다시 시작 하자. 하나님 나라 성취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우리의 삶에 겸손과 성실로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진정한 예수의 인간혁명의 소임을 다 해야 하겠다고 함께 다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