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은 욕되지 않다. /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 죽어지고 숨어야 하 는 이 계절엔 /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묻는다. // 들어 보라. /저 거짓의 거리에서 물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 여기 진실은 고독히 / 뜨거운 노래를 땅에 묻는다. " 유치환의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에서...
고통(苦痛)은 한사코 과거를 보고 싶어 하지만, 그 고통을 극복하려는 용기는 미래(未來)를 향 해 일어선다.
새로운 '국민의 정부'로 출범한 김대중 행정부의 '화두(話頭)'는 '국난극복(國難克服)을 위한 고 통 분담'이었다. 일시적 위기의 모면을 위한 캠패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실직한 한 가장의 문 제만도 아니고, 우선 발등에 떨어진 한국의 외환 위기 그것만이 아니다. 차제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인간고통의 의미를 거시적으로 보고, 먼 거리에서 보고 멀리 보며 넓혀 보아야 할 시간에 와 있다.
고통과 고난은 우리민족의 숙명이다. 오늘 어제 한번 당한 국난도 국치도 아닌 우리의 역사의 페이지 마다 피로 점철된 민족의 운명이었다. 이제 IMF가 칼질을 하고, 환율이 널뛰듯 변덕을 부리고 있다. 지금 까지 이룬 GNP 1만불의 나라가 허풍과 거품을 걷어내고 나니, 10년전 6천불 안팎으로 곤두박질 해버렸다. 허수와 허세의 안개가 걷어지고, 이제야 겨우 '제 모습'의 실체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기도 하다. 너무 늦어 버리기 전에 주어진 하늘의 기회로 맞아 야 한다.
인생은 원래 고해(苦海)위에 떠 있는 일엽편주(一葉片舟)의 항해가 아니었던가?! 풍랑을 만나면 뒤집히는 위험과 거센 바람을 만나면 표류하는 연약하고 외로운 고독의 뱃길 같은 모험의 연속 인 것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석가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인간 허탈을 고행(苦行)으로 극복을 시도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행복이란 상대적 고통의 해석일 뿐, 그 실체를 붙잡고 영원한 행복 을 구가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난과 고통은 연대성과, 개별성일수 있고, 운명적이거나 어쩔 수 없는 힘에 의한 섭리적일 수 있다. 동방의 의인 욥의 고난, 선택 받은 민족으로서 유대민족의 참담한 수난은 우리의 생각을 벗어나는 고난이다.
돈만이 인간 행복의 기준이 되고, 삶의 가치의 척도가 되는 것을 걱정한 칼.막스는 원래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가 의도한 행복의 이상은 무너지고 말았으나 그의 염려는 맞았다. "화폐는 인간의 노동과 생존의 양도된 본질일 뿐이다. 이 본질은 인간을 지배하 며, 인간은 이것을 숭배한다." 인간은 생존을 위한 제도나 억압 보다 자유를 택했다. 그렇다. 생 명의 자유를 억제할 힘은 아무 곳에도 없다. 생명의 자유에는 고통이 있고, 생명이 생명다워 지기 위해서는 고뇌의 싸움이 있다. 엄마의 탯 속에 자리잡은 생명은 진통을 준다. 살을 찢고 나오는 아픔도 살과 피가 서로 엉켜 생명이 된 다.
고통의 수렁에서는 구원이 요청된다. 인간 수렁 안에서만은 더 깊은 수렁속으로 빠져 들게 된 것이 인간 모두의 악성이다.
예수는 참으로 고통속에서 고난의 생애, 고독한 인간생명의 자유를 위해 그의 살을 찢었고, 그 의 피를 흘려 죽었다. 그의 죽음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땅 끝까지 모든 민족이 한 몸이 되어 서로 살을 나누며, 서로의 피를 흐르게 하는 공동체였다. 그것이 원형 '교회'였다.
이제 다시 한번 하늘이 열려야 산다. 하늘이 열린 것을 보는 사람들은 인류를 위한 고독과 고 통과 고난 속에서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열린 하늘을 본 사람들만이 이 일을 자기 일처럼 해 낼 것이다. 예수의 첫 삶의 시작에 하늘이 열렸다. 스테반도 열린 하늘을 보고 죽었다. 바울 도 열린 하늘 속을 갔다 온 사람이다. 베드로, 야고보, 엘리야도 보았고, 야곱도 보았고, 엘리사 도 보았고, 유배 당한 요한도 새 하늘이 열린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증언하고 죽었다.
고통분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고통을 겪어 본 사람이 할 수 있다. 예수의 고난의 상처를 가진 사람이라면 고통분담의 몸의 원리를 알 것이다. 그리고 이제 세계 모든 민족이 한 몸, 한 아픔 한 고통이라는 것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4월은 원래 잔인한 달, 언 땅에서 잠자는 생명들을 깨워 꽃을 피우는 달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도 부활의 영광도 4월에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각자 스스로의 예수의 죽음의 고통분담의 참여가 없이는 세상은 찢어지는 아픔만 계속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분담의 한시적 캠패인 만이 아니라 생명자유의 원리, 세계공동체 열린 의식으로 나 자신의 참여가 시급한 시간이다. 지난달 5백5십 만 여명이 사면되어 생명의 자유를 되찾았다.
우리도 다시 한번 특사 받은 예수의 제자들로 복권되어, 인간악성의 이기적 탐욕과 돈에만 눈 이 멀어 열린 하늘을 못 보는 우리들이 부활하는 열린 새 하늘을 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지금 보는 IMF 보다 강해야 한다. 파렴치한 세태, 국민의 혈세로 도박을 한 국회의원, 판사, 검사가 검은 돈을 먹고, 변호사가 썩고 병든 세태, 국가 안보기밀을 팔아 치우는 안기부 의 신출귀몰하는 북풍남풍조작에서 눈을 돌려, 남을 돕고 싶은 마음으로, 신문배달을 자원한 어 느 교수의 아내처럼, 53세에 대학 청강생이 된 어느 대기업 전무처럼, 자신의 외아들을 선천성 심장질환에서 살리기 위해 인공심장 개발에 성공한 교수처럼, 하늘이 열려야하는 삶의 자세를 고쳐 앉자.
지금 당한 고통보다 멀리보고, 넓게 보는 고통분담이어야 한다. 침묵 속에 오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열린 하늘을 보는, 나와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언 땅을 헤집고 묻어두고 기다리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