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 얼어붙은 도시의 거리에 구세군의 자선 냄비가 흔들어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훈훈한 인간 의 정을 불러 일으켜주고 있다. 백화점마다 빡빡이 들어선 사람들, 우체국에 긴 줄을 서있는 사 람들, 거리에 물결치듯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적막한 세상이 갑자기 들뜬 활기에 넘치고 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그 근본 의미와는 상관없이 온 지구를 떠들썩하게 바쁘게 하는 가장 큰 명절의 축제가 되고 있다.
미국에 살면서 느끼는 크리스마스는 마치 미국사람들은 일년을 12월 크리스마스를 즐기기 위해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줄만큼 크리스마스 축제를 온 정성을 다해 준비하는 분위기다. 아무리 해마다 이 흥청대는 듯한 분위기를 탈피하고 좀 태연해 보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분위기 속 에 나도 몰래 묻히고 말고 있다.
해마다 싸우고 있는 크리스마스카드 인사를 보내는 문제다. 그 형식적 겉치레에 그치고 말 카 드인사를 올해만은 보내지 않겠다고 해 결심을 하고 있다가 누군가의 잊혀진 친구에게서 카드 를 받고 나면 죄의식과 함께 서둘러 크리스마스 이브에 성탄과 새해 인사를 곁들인 연하장으로 바꾸어 보내야만 마음이라도 놓인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그 맺어진 관계를 가꾸어 가며 사는 것이다. 우연한 만남이었든지, 필연의 인연이나 연분이었든지 한번 맺어진 만남의 관 계는 생명처럼 꿈틀거리고 물처럼 흐르고 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생명관계를 시간 속에 한 올 두올 수를 놓듯, 한붓 두붓 그림을 그리듯 그리며 살다가 가는 것이다. 그 맺어진 관계의 내 용에 따라, 가꾸기 따라 그 인생이 풍성해 지기도 가난해지고 비참해 지기도 하는 인생이다. 관 계는 있으나 그 관계 속을 흐르는 내용이 없으면 그 관계는 있으나 마나 하는 관계가 된다.
가깝게는 가족과 친척으로부터, 매일 일터에서 8시간을 같이 보내야 하는 직장동료로부터, 그 옛날 6년 6년 4년을 함께 보낸 학우로부터, 마을 장터에서 날마다 보는 사람, 한 동네 모여 살 며 서로가 서로에게 편의를 도와주는 공무원도 우리와 맺어진 삶속에서 함께 살고 있는 관계 다. 국가는 국가간에 서로 관계를 가져야하는 세계공동체의 관계 속으로 우리의 삶은 연결되어 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정보통신 인터넷시대에는 세계 어느 구석에서 누가 한 말 한마디로 뉴욕과 동경, 런던과 서울의 증권시세가 파도를 탄다. 이제 앞으로 오는 세대는 이것이 더욱 밀 접되어 가는 관계, 집안에서 생긴 일이 세계로 파장을 일으켜 갈 것이다. 어차피 관계 속의 인생이라면 우리는 우리들에게 맺어진 관계를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 죽어버린 관계는 다시 살려내고, 얼어붙은 관계는 녹이고, 시들어져 버린 관계에는 다시 물을 주고, 비틀어진 관계는 다시 펴고, 멀어진 관계는 다시 좁히며 살아야 하는 삶의 원리다.
한해의 얼룩진 삶을 덮어주듯 흰눈이 소복이 내렸다. 교외에는 아직 녹지 않는 눈 나뭇가지에 빨간 색 열매 베리(Berry)가 드러나 보인다. 그 위에 빨간 색 홍관조 카디날이 그 열매를 쪼아 대는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카드를 그리고 있다. 한해를 마무리하며 크리스마스가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축복인지 모른다. 형식이라는 거 부감을 떨쳐버리고, 한해 한번이라도 따듯한 마음으로 돌아와 훈훈한 사랑의 정을 나눌 수 있 는 크리스마스를 맞았으면 좋겠다.
일년중 가장 허망한 달에 "Joy to the world"의 희망찬 캐롤이 온 세상에 메아리치고, 일년중 가장 어두움이 길기만 한 암울한 밤이, 여기저기 장식한 크리스마스츄리로 일년중 가장 밝은 밤으로 바꿔버린 크리스마스가 있는 것이 축복이다.
교리적인 논쟁은 잠시 뒤로 접어두고, 지난 14일 '부처님 앞의 추기경'이라는 표제와 함께 도하 신문들이 전면 톱으로 실은, 길상사 개원법회식에 축하로 참석한, 항상 순진한 소년 같은 카톨 릭의 김수환 추기경의 울먹이듯, 한 속죄양 같은 표정을 유심히 보면서 화해와 만남의 관계는 얼마나 값비싼 고뇌의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서로의 종 교간에 상극되는 높은 벽이 있음을 알고도 해묵은 갈등과 배타적 반목을 극복하고 싶었을 것이 다.
지난해 컴퓨터가 찍어준 주소대로 같은 뉴욕에 사는 친구에게 카드를 보냈더니 그 부인으로부 터 그 친구가 지난해 죽고 없으니 주소록에서 이름을 빼달라는 편지를 받았다. 친구를 지척에 두고 죽어버린 관계를 모른 채 살고 있는 바쁘기만하고 미루기만 하던 나의 하루하루였다.
눈이 덮어준 하얀 세계 속에 올해의 성탄을 맞는다.
잊혀진 친구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의 형식적이라도 안부편지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야만 하겠 다. 인생은 그냥 흘러만 가는 것이 아니다. 살아 숨쉬는 관계를 확인하며 성실하게 가꾸며 채워 가는 하루하루가 크리스마스처럼 아름답게 이어져 가면 좋겠다.
지난 십개월 동안,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행복을 서로 챙기며 눈물도 기쁨도 함께 나눈, 이 시 간에 만난 여러 애청자들께 감사를 드리며, 오는 새해 귀한 가정과 일터위에 만복이 깃들기를 기원하면서, 메리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투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