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꿈을 안고 21세기를 맞이한 2000년이 3년째로 접어든 2002년이다. 그러나 세상은 20세기의 숙제와 혼란을 풀지 못한 채, 극(極)으로 치닫고 있는 위기감이 내일을 볼 수 없는 안개 속이다. 사람만의 계산이 틀린 것이다. 따라잡기에 숨이 가쁜 디지털 혁명 속에 아날로그 논리가 갈 길을 헤매고, 인간의 생활 양식과 사고의 패러다임이 소용돌이 속에 허우적거리는 것을 본다.
손가락을 구멍에 넣고 돌려야 하는 전화기가 음성명령으로 이름만 부르면 호출이 된다. 디지털화 된 로봇이 인간의 노동력을 능가하며 일자리까지 박탈하고 있다. 차가운 디지털 문화가 인간 정서마저 앗아간 듯 건조한 사막에 본다면 모래를 씹는 인간관계의 껄끄러운 단절을 느낀다. 디지털을 점(點)으로 본다면 아날로그는 선(線)이고, 디지털을 입자(粒子)로 본다면 아날로그는 웨이브(wave)다. 디지털을 숫자로 본다면 아날로그는 언어라고 볼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노래 가락이 디지털로, 사진, 영상, 그림이 디지털로 변환된다. 정확하고, 빈틈 없고, 오차가 없다.
아프간 전쟁을 보면서, 미국의 첨단 디지털 무기와 아날로그를 당나귀에 싣고 험산 준령을 넘고 땅굴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문명과 전통문화의 처절한 혼란의 카불 문명을 본다. 그 카불 문명이 우리가 당면한 의식이고, 디지털에 쫓기며 사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에서 잃어버린 인간 근본 정서를 찾아가는 지혜와 학습이 요청되는 시대이다. 급할수록 차분하게, 변화가 무쌍할수록 인간성의 여유를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 같다. 정확성과 유연성, 변화와 보수의 조화를 찾는 2002년 학번을 달고 배워 나가야 할 새해다.
얼마 전 여행을 하면서 차를 빌렸는데, 그 차의 패널 계기는 모두 숫자로 표시되는 이른바 디지털이었다. 속도와 시계와 연료표시 등 모두 숫자로만 보이는 차를 타고 긴 여행을 하면서 한참 동안 바늘 표시로 보인 아날로그가 더 친숙하고 인간 적응에 익숙하다는 것을 느껴보았다.
전쟁과 문화와 정치와 구조조정, 경제지표와 증시의 무쌍한 변동을 보면서도, 디지털로 짜여진 일정관리를 실행하면서도 짜증과 좌절이 엇갈리는 극복을 위해 ‘디지’와 ‘아나’의 타협을 시도하는 한 해가 되고 싶다. 죽음은 디지털이고, 생명은 아날로그이기 때문이다.
숨가쁜 테러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도날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의 기자회견 표정을 보면서 ‘디지로그’ 시대에 배워야 할 자세를 정립해 본다. 역사의 기록은 디지털이고, 당시 상황은 아날로그다. 투자심리는 아날로그이고, 경제지표는 디지털이다. 긴박하고 위험한 삶의 전투 상황을 여유와 미소로 소화할 수 있는 스스로의 지혜를 가꾸어야겠다. 그래서 정확성과 유연성, 차가움과 따스함, 틈새 있는 여유로움을 누리는 한 해가 되기를 소원해 본다.
계획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기계나 로봇이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지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 배신을 한다?
그것은 내게 동지 친구도 있고, 배신 친구도 있다는 사실이다.
나라의 정치와 관료의 부패와 구조조정과 공정위가 헛돌고 있고, 남은 것은 실망과 공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