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언덕에서 얼레에 감긴 연실을 풀어 칠색의 무지개 연(鳶)을 구름 넘어 날리고 싶다. 누구였을까 맨 처음 실끈에 마음을 달아 구름을 벗어나고 싶었던 사람은….
여름마다 당하는 광란의 몸부림 같은 태풍, 물난리, 산불, 빗길에 미끄러진 대형 하이웨이 자동차 사고, 최첨단 항공기 콩코드 추락, 산사태와 몸살난 휴가병 탈진으로 돌아와야 할 때, 9월은 제 정신으로 돌아서는 달이다. 여름숙제를 싸들고 선생님 앞에 선 어린 학동의 모습이다.
여름은 무턱대고 놀아난 벤처의 계절이기도 하다. 벤처 투자 높이만큼 성장도 할 수 있고, 오히려 탕진으로 줄어든 자신을 볼 수 있는 달이다. 사이버텍 시대로 들어선 벤처 열풍으로 투기성 벤처문화가 정신세계까지 사로잡고 있다. 미국에서는 하루에 4천 개의 벤처기업이 생기고 4천 개의 벤처기업이 사라지고 있다. 한국도 6천을 헤아리는 벤처기업이 풍선처럼 떠있다. 원래 벤처(venture)라는 단어는 ‘모험, 과감히 해보다’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묻지마 투자’이다.
몇 주 전 통계로는 한국 벤처산업의 79퍼센트가 존속의 위기를 안고 있다고 한다. 벤처(venture)라는 말에 ‘애드’(ad)를 더하면 ‘애드벤처’(adventure)가 된다. ‘애드벤처’(adventure)는 ‘무엇과 함께 모험을 시작한다’는 뉘앙스가 있는 말이고, 영어의 advent는 성탄 4주 전 강림절과 ‘예수의 재림’을 의미한다. venture 문화의 열풍 속에 ad+venture를 생각해야 할 시간이다. 예수 사건과 함께 하는 ‘시작’이다.
55년 간 먹구름으로 덮혀 있던 남북의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조바심을 안고 조심스럽게 한 핏줄 한민족의 하나되는 염원을 풀어 가는 ‘모험’이 ‘시작’되었다. 벤처+ α(알파)이다. 벤처에는 개인벤처, 기업벤처, 집단벤처, 국가벤처, 다국적 M&A벤처, 민족적 벤처도 있다.
바람이 불어야 연이 뜬다. 바람이 없으면 달려가면서라도 연을 띄운다. 바람개비가 돌지 않으면 달려가면서 돌린다. ‘벤처 바람’에 우리의 숙원인 통일 화해의 애드벤처를 꿈속에서 띄우고 싶다.
“차마 못 끊는 정(精)인 양/ 이어진 실 끝을 물고/ 천심(天心)을 겨누어 나는/ 한 조각 하이얀 꿈을/ 찬바람 저문 날에도/ 내릴 줄을 몰라라.” (이호우/지연 紙鳶)
이 가을 우리들 마음에 사랑의 실을 달아 통일의 연을 날리자. 연(鳶)놀이는 액운(厄運)을 날려 버린다는 민속 의미도 있다. 마음은 사이버보다 넓고, 광속보다 빠르다. 마음의 에너지는 핵 개발보다 강하다. 서로의 마음이 바뀌면 ‘기적’은 시간문제다. 남북교류 광속(光速)시대다. 55년 녹슬어 죽어버린 철마가 일어선다. 끊어져 버린 철길이 이어지고 칼날 같은 철조망이 걷히고 하이웨이가 트인다. 개성 관광길이 ‘돌아올 수 있는 다리’로 돌아온다. 지척에 평양을 두고 중국을 경유했던 항공로가 직항로가 되어 서울 평양이 1시간이면 오고간다. 서로가 달라져 버린 말의 의미도 방언처럼 터질 것이다. 동독의 장벽은 쇠망치로 부셨지만 우리의 장벽은 마음으로 허문다. 경의선이 복구되면 부산에서 러시아 대륙을 관통하여 파리, 런던까지 기차길 신실크로드가 열린다. 지뢰밭 비무장지대가 국립공원이 된다. 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이 눈물로 얼싸안고 흐를 것이다. 노벨 평화상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두 손을 나란히 잡고 함께 받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야 마음의 연(鳶)이 먹구름 위로 날아 오른다. 에스겔 골짜기 해골이 돼 재가 된 뼈가루들이 바람이 불어 생기가 돌아 산 사람으로 살아났다. 알파 플러스 애드벤처의 예수의 바람이 불어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 생기의 바람, 마음을 바꾸는 바람이 불어야 한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에 반대했다가 처형을 받기 몇 시간 전에 당국의 선처로 목숨을 건진 피티림 소로킨(Pitirim Sorokin)은 미국 땅에 망명하여 하버드대학 사회학 주임교수를 지냈다. 그는 말년에 이타심(altruism)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인류의 장래는 어떤 제도나 과학 기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는 ‘마음의 혁명’에 달려 있다고 확신하였다. 남을 사랑하는 ‘마음의 혁명’이 없는 현대 기술의 발전은 한때 저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처럼 우리 모두에게 암흑을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책상 위에 유리로 만든 투명한 지구본이 있다. 뉴욕에서 서울이 지구를 꿰뚫어 한눈에 보인다. 지구의 극과 극의 거리가 한눈에 보인다. 속 좁은 당리당략의 선점선취 욕구 불만으로 물고 뜯고 늘어지는 한국의 정치권은 여의도공원에서만 놀다가 숙제 못한 유치원생만도 못한 치졸성 추태 치부를 가리지 못하고 있다. 마음의 연(鳶)줄을 얽힌 실타래를 풀듯 높이높이 먹구름 위에서 한반도를 보는 제정신으로 돌아서야 한다. 벤처만의 풍선을 띄워 거품이 되어서도 안될 일이고, 조급증에도 조바심에도 맴돌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뉴욕에 있는 라디오서울 주최로 ‘One Korea Festival’이 지난 광복절 자유의 여신상 공원에서 열렸다. 2,000개의 연(鳶)을 푸른 하늘에 띄웠고 칠색 연이 실 꼬리를 물고 하늘을 수놓았다. 우리 민족의 한 맺힌 통일의 염원을 날린 것이다. “한국에서 연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설날에 어린이들은 모두 그들의 소원을 하늘에 보내기 위해서 연을 선물로 받았다. 하지만 일본의 지배자들은 연의 제조와 싸움도 금지케 하였다. 연을 가지고 놀 때 한국인은 의젓하였다. 그들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을 쳐다보는 자는 노예의 조건을 거부한다.” (C.V.게오르규/한국찬가)
지금이야말로, 에스겔 골짜기 환상이 “천국은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너희 안에 있다”는 예수의 말씀이, ‘마음먹기’ 새로운 의미로 우리들 마음문 앞에 와 있다. 우리의 기대와 희망은 남북 정상의 합의 약속보다 위에 있는 플러스 알파의 애드벤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