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가고 있고 벌써 2월 4일, 입춘에 접어들었다. 겨울 같지 않게 가고 있는 올해의 겨울을 지나면서 입춘을 맞고 보니 무엇엔가 속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방안에 걸어둔 여기 저기 2월의 칼렌다를 걷어올리니 2월의 분위기를 알려주는 사진과 그림이 새삼 겨울이 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엘리뇨' 이변이라니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또 '엘리뇨'는 가고, 엘리뇨'와는 반대 현상을 일으키는 '라니야'가 온다니 기상이변의 변칙적 행운을 기대해 보아도 될는지 모르겠다.
"머언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오리목 속잎 피는 열두 구비를 / 청노루 맑은 눈에 / 도는 구름.//" 박목월의 "청노루" 시감에 감촉이 인다.
2월의 어느 달력 그림은 깊은 산골에 얼어붙은 계곡 물이 반쯤 녹아 얼음은 가운데 두고 녹은 물이 틈을 내어 양쪽으로 흐르고 있다. 다른 달력을 올리니 이때가지 쉽게 보지 못했던 대양위에 떠 있는 빙산의 사진이 나온다. 특수 촬영으로 바다 위에 보이는 빙산과 바다 밑에 그 빙산을 떠 받히고 있는 거대한 얼음 얼음 덩어리가 보인다. 뽑아 놓은 치아의 뿌리처럼 선명하게 찍은 사진이다. 바다 위에 떠있는 빙산은 눈으로 덥혀 있다. 빙산의 사진을 보는 순간 섬직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빙산은 남극과 북극에서, 봄에서 여름철에 이르는 온난한 시기에 대양을 떠돌아다닌다. 북극의 그린랜드와 남극대륙의 빙원(氷原)에서 분리되어 생겨 나는 빙산의 수는 해마다 수백만 개에 달한다. 이들은 북에서 남으로, 남극의 경우 북쪽으로 바람과 조류에 따라 이동한다. 떠돌다가 온도의 상승에 따라 서서히 녹아 그 자취를 감추고 만다. 바다 위에 나타난 부분의 높이는 보통 150m에 달하지만 길이는 600m에서 5마일에 달하는 엄청난 것까지 있다. 눈에 보이는 부분의 90퍼센트 이상이 바다 밑에 숨어 있으니, 떠있는 빙산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쓰는 말로, 드러난 사건이나 눈에 보이는 현상 뒤에 엄청나게 숨어 있는 배후나 잠재성을 일컬어 '빙산의 일각'이라는 경구를 쓰고 있다. 지난해 영화로 히트를 쳤던 '타이타닉' 영화는 '빙산의 일각'이 얼마나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것인가를 일깨워 주고 있다. 당시 대영제국의 최첨단 기술로 만든 4만6천톤의 호화 스팀쉽, 1912년 4월14일 2,220명의 승객을 태우고 항해하다, 빙산을 비켜가지 못해 1,513명의 생명을 바다에 수장하고 말았다.
우리가 지금 충돌하고만 IMF의 무서운 빙산충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수없이 떠돌아다니는 한국적 병폐의 파괴적 빙산현상을 보아 왔다. 삼풍이 주저앉고, 성수대교가 두동강이 나고, 한보비리, 현철 비리등의 눈에 보이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그 밑에 90퍼센트의 썩고 병든 윤리성, 도덕성의 부패, 정경유착, 재벌의 이기적 독점 욕구, 덩달아 날뛴 과소비 풍조, 조게종 승려들의 칼부림 싸움, 정종유착의 치부, 귀족 계층을 이룬 한국의 종교인들, 썩어빠진 엘리뜨층의 썩고 병든 구조 속에서 더 영리하게 이용해서 제자리 찾아 한자리 한 학자, 교수들의 배신적 놀이터 위에서 한국은 썩어가고 있었다. 물에 뜬 빙산이야 가벼운 얼음 조각으로 보아 넘기도록 GNP 1만불의 환락의 환각을 불러 일으켜 흥을 도꾸어 준 소위 엘리뜨들 이었다.
지금 다시, 천호대교, 서강대교, 한강대교가 흔들리고 있다. 국회는 개싸움보다 더한 추한 귀공자 엘리뜨 싸움판이다. 질서의 원천 법조계층, 교육계층, 모든 계층, 모든 분야 속에 도사리고 있는 귀공자 엘리뜨들의 어이없이 썩어버린 구조 속을 들여다보면 망국적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억울하게 당한 일반 죄 없는 일반대중, 노동자농민들만 3등칸에 탄 타이타닉호 승객이 되었다.
'재벌개혁' '고통분담'을 김대중 대통령이 소리 높혀 외쳐도 아직도 재벌은 재벌대로 놀고만 있다. 터진 사건 뒤에 원인이 있다. 눈에 보이는 현상 속에 엄청난 원리의 세계가 있다. 이번에 당한 IMF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전근대적 의식과 사고의 체질개혁'이 이루어져야 살아 남는다. 지금은 이미 옛날의 지금이 아니다. 우물안 개구리에서 우물 밖의 개구리로 튀어나오는 의식의 혁신이 없이는 IMF보다 더 무서운 빙산충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깨어 있는 의식의 보다 형성된 무의식의 빙산의 뿌리는 깊다. 최근 나온 두 권의 책을 흥미 있게 읽었다. 하나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가 이상하게 변해 버린 한국을 보고 쓴 책, <대한민국이 망한다?-한국 분-한국인-한국 놈>의 책이고, 또 하나는 꿈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망명한 북한의 엘리뜨, 동독이 무너지면서 죽음을 걸고 조국에 와서 보고 <당신들이 그렇게 잘났어요?>라는 책이다. 과거야 어찌 되었던 지금의 한국의 현 의식구조를 알려면 이 두 권의 책만 읽어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빙산의 일각' 이 말은 부정적 의미로 쓰면 무서운 파멸을 갖지만, 긍정적으로 쓰면 새로운 도약의 무한 잠재적 가능성을 일깨워 주는 말이기도 한다. 지금 우리 고국은 '빙산의 일각'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시간이다. 얼어붙은 계곡의 눈 녹은 실개천이 틈을 내서 흐르기 시작했다. 한겹 두겹, 한결 두결 얼어붙은 국민의식의 숙제를 풀어야 할 시간이다.
나는 우리민족의 무한 잠재적 가능성을 믿고 싶은 사람이다. 맨발로 물 속에 빠진 골프 공을 쳐 올린 박세리 같은 투혼을 믿는다. 봄소식이 멀지 않듯이 우리고국의 새봄도 멀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국난극복(國難克復)의 우리 민족의 저력이 IMF 쯤이야 밀어 부쳐버릴 수 있는 더 큰 빙산의 일각이었던 것을 믿고 싶다. 그러나 더 무서운 빙산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귀족성 귀공자 엘리뜨 의식이 예수엘리뜨 의식 개혁으로 혁명되어야 하는 과제가 예수 프론트라인 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