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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아버지보다 ‘나은’ 며느리(다 말)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I. 다말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창 38장)

    구약성경에 다말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세 명 나오는데, 그 중 하나는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인물이며, 두 번째 인물은 사무엘하 13장에 나오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친 누이로 이복 형제인 암논에게 강간당하고 버림을 받는 비운의 여인 다말이며(대상 3:9), 세 번째 인물은 압살롬의 딸로 그 이름이 다말이다(삼하 14:27).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인물은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여인 다말이다. 신학교 학생들에게 이 다말이 누구인지를 묻는 사지선다형 문제를 낸 일이 있다. ‘다음에서 다말과 관계된 상황을 모두 골라라.’가 그 문제였다: (1)유다의 며느리 (2)엘과 오난의 아내였다가 과부된 자 (3)유다의 두 아들의 어머니 (4)유다의 아들 셀라의 형수이자 약혼녀.

    정답은 (1)(2)(3)(4) 모두 다이다. 이렇게 한 번 결혼했던 여자가 여러 남자와의 복잡한 인간관계에 얽히게 된 사건이 창세기 38장에 나온다. 그 사연은 무엇인지, 왜 그렇게 되었어야만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유다의 결혼(창 38:1∼6)

    다말 스토리는 사실 유다(야곱의 열두 아들 중의 넷째 아들) 스토리와 맞물려 있다. 그리고 유다 스토리는 요셉 스토리(창 37:2∼50:26) 속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어, 사실상 요셉 스토리는 야곱 가족의 스토리임을 보여 준다(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창 37:2). 또한 다말 스토리가 나오는 창세기 38장은 요셉이 형들에 의해 막 애굽에 팔려버리고(창 37장), 애굽에서 보디발의 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창 39장) 스토리의 사이에 위치해 있어, 요셉이 애굽에서 세월을 보내는 동안 한편에서는 동생을 파는 데 앞장섰던 유다(창 37:26)의 삶은 어떠했는지 요셉의 형들을 대표격으로 해서 나와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 38장의 첫 마디인 ‘그 후에’(창 38:1, 원어로는 ‘그때에’)라는 단어는 37장과의 연결성 속에서 ‘요셉이 팔린 사건이 있은 그때에’라고 이해해야 한다. 유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찾아 자기 형제들을 떠나 히라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살게 되며, 거기에서 수아라고 하는 자의 딸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문제는 그 여인이 가나안 사람이라는 데에 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피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나오는데, 거기에 반해 유다의 결혼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족장들을 향한 계획에 무관심할 뿐 아니라 매우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유다는 결혼하여 엘, 오난, 셀라라고 하는 세 명의 자녀를 두게 된다. 그리고 유다가 첫째 아들 엘을 위하여 아내를 얻어 주는데, 이때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엘의 아내 다말이라는 여인이다.

    다말의 불운한 결혼생활(창 38:7∼11)

    다말은 ‘종려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말이 유다 아내의 경우처럼 가나안 여인이라고 구분되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히브리 여인인 것으로 추정된다(비교: 대상 2:3∼4).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같은 이유로 다말을 가나안 여인으로 본다. 본문이 그녀의 배경을 알려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정적인 답을 찾기는 어렵다. 다말의 첫 결혼생활은 불행으로 끝난다. 저자는 “엘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창 38:7)라고 기록하고 있다. 죄상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여기에서의 중점은 하나님이 그를 죽이셔야 했을 만큼 그의 죄가 심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말은 그 죄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장자 엘이 죽자 유다는 그의 둘째 아들 오난에게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창 38:8)라고 명한다. 우리에게는 금방 거부감이 일어나는 명령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의 문화 속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풍습으로 모세의 율법에서도 소위 계대결혼(Levirate Marriage)이라고 하여 죽은 형(또는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여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함으로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후에 모세오경에서 성문화됨, 신 25:5∼10).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관습은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가벼운 사건이 아닌 대가 끊기느냐 아니면 이어지느냐 하는 중대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오난은 이렇게 중요한 본인의 의무들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아서(창 38:9),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회피해 버린다.

    본문에서 ‘씨’라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함으로(히브리어 본문에서는 38:8∼9에서 3번 사용하고 있음)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주셨던(창 12:2; 15:5∼6; 17:5; 22:17; 26:4; 28:3; 32:13; 35:11) 후손(씨)을 창대케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상기시키고 있다. 즉 이 사건에서 오난은 자신의 이기적인 계산속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에 정면 도전을 한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여호와의 목전에 저지른 악으로 인하여 그도 죽임을 당한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 일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시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제 유다에게 남은 마지막 아들은 셀라인데 여기에서 유다는 자기 아들들에게 문제의 원인이 있었음을 보지 못하고, 다말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셀라를 다말에게 장가보내는 것을 보류한다. 유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대를 잇게 하기보다는 우선적으로 셀라의 목숨을 보존케 하고자 하는 근시안적이고도 불신앙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이 외아들인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까지도 순종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유다는 결국 하나님의 계획에 역행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말은 우리 나라의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팔자가 센 여인이다. 남편이 둘씩 죽고 자식도 없이 과부로 젊은 나날을 보내며, 셀라가 장성하기만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처지이다. 그것도 말뿐이지 유다는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을 생각을 이미 작정해 놓은 상태이다.

    다말의 운명에 대한 도전(창 38:12∼23)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유다의 아내 즉, 다말의 시어머니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창 38:12). 이 사건은 유다가 왜 창녀의 접근에 쉽게 넘어갔는지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그가 상당한 기간을 홀아비로 지내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이제까지 상당한 세월이 흘렀고(창 38:12, 얼마 후에,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 동안 다말도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버린다든지 자기 나름대로의 살 궁리를 하기보다는 유다의 약속을 믿고 인내심 있게 기다려 왔음을 본문은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다말은 유다가,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줄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깨닫는다(창 38:14). 이제 그렇다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긴 하나 유다 집안에서 다말에게 ‘씨’를 줄 수 있는 남은 유일한 선택은 유다뿐인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당연히 해야 할 의무와 약속을 먼저 어긴 사람은 유다인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다말은 이제까지의 수동적인 태도를 바꾸어 마지막 그녀에게 남은 한 가지의 선택을 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행동을 개시한다.

    여기에서 ‘다말이 보여준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며 본이 될 수 있는 행동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문제의 핵심을 너무 단순화시켜 버리는 종류의 질문이라 할 수 있다.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다말이 선택한 행동이었으며, 그녀의 동기는 며느리로서 자기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유다는 다말에 비해 옳은 행동이 하나도 없다. 며느리에게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말이 창녀로 변장했을 때에 창녀를 가까이 한 것도 도덕적으로 칭찬 받을 만한 일이 아니다(신 23:17∼18).

    후에 모세의 율법에서는 “누구든지 그 자부와 동침하거든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하였음이라.”(레 20:12; 비교 18:15)라고 엄히 이 죄를 다스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말의 이러한 행동은 모세오경의 율법에도 분명히 어긋나는 당시의 문화적인 배경 속에서도 있을 수 없는 행위였음에는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성으로 따지자면 그녀의 행위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그녀로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유다 가문의 ‘씨’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의 절박성을 더욱 강조시켜 주고 있다.

    누가 더 옳은가?(38:24∼26)

    석 달쯤 후에 드디어 다말의 임신이 겉으로 드러나고 그것이 유다에게 알려지게 된다(창 38:24). 유다가 시아버지로서 노한 것은 당연하나 그 반응이 조금 지나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분명 죽음을 면치 못할 죄이긴 하나(신 22:22∼24) 끌어내어 불사르라는 것은 제사장의 딸이 행음하였을 경우에만 해당하는 벌인데(레 21:9), 유다가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보아 본인의 부도덕성에 대한(창녀에게 자신임을 증명하는 물건을 주었다가 찾지 못해 불안한 마음까지 가세하여) 보상심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말은 끌려나가는 임박한 순간에 그녀가 지니고 있던 시아버지의 물건들을 자신의 무죄를 증거하는 물증으로 내어놓는다. 여기에서 “청컨대 보소서”(창 38:25)라는 단어는 유다가 주동을 하여 꾸민 요셉을 판 사건에서 요셉의 피 묻은 채색 옷을 그 아비 야곱에게 보이면서 “보소서”(창 37:32, 원어로 보면 ‘청컨대 보소서’)라고 한 말과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치 유다가 아비를 속인 대가를 며느리에게 속음으로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든다. 차이점이 있다면 유다는 악한 동기로 아비를 속인 것이고, 다말은 선한 동기로 시아버지를 속인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은 다음 장(창 39장)에 나오는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성적인 유혹을 물리치는 점에서 유다와의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 유다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해, 또한 며느리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이러한 행동을 저지른 며느리에 대하여 본인이 죄를 물을 수 있는 자격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유다는 “그(다말)는 나보다 옳도다(She is more righteous than I.)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창 38:26)라고 하며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고 자부의 의로움을 인정한다. 이 사건은 유다의 삶 속에서 처음으로 본인의 잘못을 인정함으로 변화를 겪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고대 근동의 관습이 우리와 차이가 있다고 하나 모세의 율법에도 나와 있듯이 이 사건은 유다에게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말의 후손(창 38:27∼30)

    이렇게 하여 다말은 베레스와 세라라고 하는 쌍둥이를 생산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베레스는 후에 보아스와 다윗의 조상이 되며, 결국 다윗의 자손 중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는 영광을 입게 된다. 다말은 하나님의 계획에-비록 방법론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낯설고 정당한 방법이 아니었으나-적극 참여하여 열두 지파의 조상인 유다보다도 또한 그 아들들보다도 의로운 며느리로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최초의 여인이 된 것이다(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마 1:3).

    2.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가 약속하신 것을 철저히 성취해 나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유다는 족장 중의 하나로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본을 받아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말씀에 영적 무감각성을 보였다. 하나님의 계획을 가벼이 여기고 이방 여인과 결혼하였을 뿐 아니라 대를 잇는 일에도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말의 책임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 뜻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이방인과의 사이에서 난 자식들과의 ‘씨’가 아닌 유대인인 다말과 유다 사이에서 난 자식들을 통하여 그 계보를 보존하셨다(룻 4:18∼22). 그리고 그 속에서 약속된 구원자를 온 인류를 위하여 보내셨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그것은 약속하신 그대로 성취되어 나갈 것이다. 이런 거대한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과연 나는 그 일에 어떠한 참여를 할 것인가’이다.

    둘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다말과 야곱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 다 모두 변장을 통하여 상대방을 속임으로 장자에 속하는 복을 얻었다. 다말의 경우는 장자의 대를 잇는 자식을 생산하였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왕국을 우선순위로 삼지 않는 자들을 앞질러 일을 저지른 것이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는 자’(창 25:34)인 에서를 속였으며, 다말은 족장으로서 대를 잇는 의무를 소홀히 취급한 유다를 속였다. 두 사람 다 그것 때문에 나름대로 고통을 겪었다. 야곱은 형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어머니의 임종도 보지 못하는 삶을 살았으며, 다말도 태워 죽임을 당할 위기를 넘겼다. 또한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인륜을 벗어나 시아버지의 자식을 낳은 것이 얼마나 개인적인 고통이었겠는가는 미루어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결코 그들의 방법론이 옳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것을 얻기 위해 열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삶을 투자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약속된 복을 허락해 주신 것이다.

    또한 그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아야 한다. 그들이 속이는 방법을 썼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얻은 것이 결코 아니다. 야곱의 경우는 이미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약속해 주신 것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으려다 오히려 일만 복잡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얻기 위해 열정을 쏟았다. 우리도 그러한 자세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겠다고 약속하 신 지상명령의 성취에 우리의 열심을 기울일 때에 우리의 삶이 풍성할 수가 있을 것이다. 결국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마 11:12)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셋째, 하나님의 구속사의 심오한 뜻을 묵상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깊은 의아심을 주는 것은 왜 하필 예수님의 족보 속에 이런 불결한 사건 속에서 태어난 조상이 끼어 있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순결하시고 거룩하시고 죄 없으신 예수님을 탄생시키시는 데에 있어서, 또한 순결하고 거룩하고 완벽한 도덕성과 고결한 인격과 믿음의 소유자들만을 골라서 조상들을 구성하실 수가 없으셨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분의 능력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과정 속에서도 보여주시는 ‘은혜’라는 그 분만이 소유하시고 계신 신비한 속성을 깨닫도록 도와준다.

    인간들은 완벽한 것을 추구하면서 그런 완벽함이 인간 속에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결국 인간에게는 완벽이란 있을 수 없고 불완전함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어느 한 족보를 통하여 오셨지만 인간의 혈통이 아닌 성령으로 오셔야만 하셨으며, 그것을 통하여 어떻게 인간과 신이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신비를 벗기셨다. 즉, 부족한 인간의 족보를 통해서 메시아가 오신 그 자체도 은혜의 메시지요, 구원의 소식이라는 것이다.

    다말 스토리는 우리에게 그런 의미에서 커다란 위로와 희망을 준다. 그것은 다말 같은 소위 ‘팔자가 센 여인’의 후손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님이시라면 그 분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자에게는 다 다가오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의 탄생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平和)(눅 2:14)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