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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끄러운 구원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 롯(창 11:27∼32; 12:4, 5; 13:1∼13; 14:12, 14, 16; 19:1∼38) -

    1. 성경 속에서 찾아보는 인물 연구

    족보 속의 롯(창 11:27∼32; 12:4, 5)

    롯은 아브라함 스토리(창 11:27∼25:11) 속에 끼어서 등장하는 전형적인 조연이다.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소개해 주는 족보를 보면(창 11:27∼32) 여러 가지 정보들이 있지만 롯과 연결해서 살펴볼 때에 세 가지 중요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롯이 아브라함의 조카뻘이 된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 사이에 자식이 없다는 점이다(창 11:30). 셋째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갈 때에 롯이 아브라함을 따라 나온 사실이다(창 11:31). 물론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도 함께 나왔지만 데라가 앞으로 일어나는 사건에 어떠한 역할도 차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순수한 엑스트라) 창세기의 저자는 재빨리 데라의 죽음을 언급하고(창 11:32, 데라는 이백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아브라함, 사라, 롯만을 주요 등장인물들로 남겨 놓는다(창 12:4, 5,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위의 요소들을 종합해 보면 아브라함이 무자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일찍 여읜 롯이(창 11:28) 아브라함의 뒤를 이을 자손으로 입양되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저자는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있다. 그래야 왜 롯이 아브라함을 따라 나섰는지가 설명된다. 그러나 저자가 그것을 뚜렷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롯은 아브라함과 운명을 함께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아브라함과의 분리(창 13:1∼13)

    창세기 13장은 아브라함이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피신해 있다가 애굽에서 나오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롯도 함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13:1). 그들 모두가 다시 가나안 땅, 아브라함이 처음 도착했었던 장소로 돌아와(창 13:3; 비교 12:8) 정착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치 못하였으며” 그 이유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고 또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는고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창 13:5∼7). 생존경쟁은 어디나 있는 법이며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간에 다툼이 일어나고(창 13:7),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도 상당한 긴장감이 있었던 것 같다(창 13:8,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시편(133:1)에 보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이상적이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므로 아브라함은 다투는 것보다는 분리하여 사이 좋게 사는 편을 제안한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

    아브라함의 관대한 제안에 대해 동양적인 사고 방식으로 보면 조카로서 당연히 ‘형님 먼저’ 하는 것이 예의인데 롯은 기다렸다는 듯이 재빨리 가장 좋은 곳을 빼앗길 새라 고르느라 정신이 없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열심히 고른 곳이 묘사되어 있는데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는 상당히 부동산으로서의 가치가 있어 보였으나 저자는 우리에게 결국 롯의 부동산 고르는 안목이 영적으로는 짧았음을 몇 가지로 지적해 주고 있다.

    첫째, 롯은 소돔을 택한다(창 13:12). 그러나 말씀은 우리에게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다고 알려 주고 있다. 둘째는 그곳이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에덴 동산은 누구도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진짜 여호와의 동산은 결코 있을 수 없다(창 3:24). 또한 소돔에는 악한 죄인들만이 가득하였고(창 13:13,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애굽 땅의 풍요로움이 있어 보이나 애굽 땅은 약속의 땅과는 거리가 멀다. 결국 칼빈이란 학자가 말한 대로 ‘롯은 낙원에 산다고 착각했으나 지옥의 구덩이로 던져진 것과 같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셋째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제까지 창세기에서 ‘동으로 옮긴다’는 표현 자체가 다 부정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에덴을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간 곳이 동편이며(창 3:24),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간 곳도 에덴 동편이며(‘에덴의 동편’; 창 4:16), 바벨탑을 쌓은 자들도 ‘동방’으로 옮겨가다가 정착한다(창 11:2).

    이런 이미지들을 부각시키며 저자는 롯이 ‘동’으로 옮겨간다는 표현을 통하여 이미 우리들에게 롯의 행각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심판의 가능성을 가르쳐 주고 있다. 넷째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롯이 아브라함과 분리된다는 사실이다. 그는 약속의 땅의 변방으로 옮겨가 약속의 땅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아브라함과 독립함으로 그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가능성도 희박해졌다. 또한 그것은 아브라함과 함께 있을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서도 거리가 멀어짐을 시사한다. 저자는 서로의 정착지의 대조를 통해 결론을 분명히 한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약속의 땅)에 거하였고 롯은 소돔까지 이르렀더라”(창 13:12).

    아브라함과의 분리의 결과(창 14:12, 14, 16)

    창세기 14장은 동방의 왕들이 싯딤 골짜기에서 서방의 왕들과 전쟁을 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 전쟁의 와중에서 소돔에 살고 있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사로잡혀 가는 일이 발생한다(창 14:12). 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어 대승을 거두는데(창 14:12∼15),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14:16).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을 맞이하는 두 왕이 있는데 성경에서는 그들의 대조적인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하나는 그 유명한 멜기세덱으로, 떡과 포도주로 아브라함을 영접하고 그에게 복을 줌으로 그 또한 복을 받는다(창 14:18∼20). 또 다른 왕은 소돔 왕인데 아브라함에게 아무 것도 가지고 나오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첫마디는 ‘사람은 내게 보내고(give) 물품은 네가 취하라(take)’는 것이다(창 14:21). 그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가질 것(take)에 먼저 관심이 있었던 지독히 이기주의적이며 적대감마저 느껴지는 종류의 인간임을 나타내고 있다.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으로 가서 롯이 맞이한 첫 사건은 이런 것이었으며, 아브라함에 의해 간신히 구원을 받았고 그가 살고 있는 영토의 왕도 ‘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소돔이 이번에는 인간 왕들의 심판을 받았으나(동방의 왕들의 침략을 받음으로) 다음 번에는 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전조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서 간신히 구원받은 롯(창 19:1∼38)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건이다. 후에 선지서들과 신약의 저자들조차도 이 사건을 하나님의 심판의 대명사로 꼽고 있다(사 1:9; 13:19; 렘 23:14; 49:18; 50:40; 암 4:11; 습 2:9; 마 10:15; 벧후 2:6). 그러한 심판의 소용돌이 속에서 폭풍의 눈처럼 그 중앙에 살고 있었던 자가 롯과 그의 가족이었다. 창세기 19장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과 함께 롯과 그의 가족들의 구출 장면을 그리고 있다.

    시작 부분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 전 장에서(창 18:1∼8)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것처럼 롯도 똑같이 천사들을 대접한다(창 19:1∼3).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기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데(창 18:20∼33) 결국 열 명의 의인을 찾지 못해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 부분을 읽는 독자들은 마음속으로 롯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연 롯은 의로운 자일까?’, ‘그가 의로운 자라면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한 명의 의인으로 인해 혹시 소돔과 고모라를 살리시지는 않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19장의 본문말씀은 하나하나 답변을 해 준다. 먼저 저자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롯도 아브라함처럼 친절하고 호의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도표 참조). 사실 롯의 친절은 그 정도를 넘어 ‘지나친 친절’을 보이고 있다. 소돔 백성들이 ‘노소(young and old)’를 무론하고 다 몰려와 롯 집에 머물고 있는 천사들을 강간하고자 할 때에 롯이 목숨을 걸고 그들을 만류하면서(창 19:6,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처녀인 두 딸들을 그들에게 내어주려는 정도로 필사적으로 자기 집에 방문한 손님들을 지켜주려는 노력을 한다(창 19:8).

    그는 의로운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롯에 비해 소돔 사람들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구제불능의 사람들로 보여진다. 그들의 악은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보나 현대의 기준으로 보나 심판이 불가피함을 우리들에게 역력히 보여준다. 더 이상 도덕이나 양심이나 이성이나 설득이 통하지 않는 불법의 집단들이요, 마치 잡히는 것은 다 잡아먹으려는 야수와 같은 무리들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 속에서 천사들의 서스펜스한 ‘롯 구조작전’이 펼쳐지는데, 문제는 천사들의 조급함에 비해(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롯의 반응이 시원치 않다는 것이다. 곧 멸망한다는 천사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롯이 지체했을 뿐 아니라(창 19:16), 산으로 도망가라는 지시에도 따르지 않고 소알이라는 성으로 도망가기를 요청한다(창 19:17∼22). 즉 저자는 이것을 통하여 롯의 의로움이나 순종이 불완전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가족들은 더욱더 상태가 심각하다.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고,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간신히 성 밖으로 나온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으며(창 19:26), 롯의 두 딸들은(그나마 이들이 처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동침함으로 수치스러운 일들을 자행했다(창 19:31∼38). 성경의 저자는 롯의 구원은 결국 그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창 19:29)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아브라함, 즉 복의 근원을 떠나 소돔을 택한 롯에게는 너무나 많은 손실이 있었다. 그는 그의 모든 재산과 집과 사위들과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버렸고, 딸들도 소돔의 가치관에 물들어 버렸으며 그가 생각했던 낙원은 최악의 도시였다. 그는 의로운 자에 가까웠으나 그의 의로움과 순종은 불완전한 것이었으며 아브라함의 기도와 의로움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되었다.

    2.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우리도 얼마든지 롯과 같은 인물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롯의 스토리를 읽으며 당연히 아브라함과 동일시하며 그를 모범으로 삼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들은 아브라함보다는 롯에 가깝다. 의롭게 살려고 하지만 우리가 사는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 따르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타협할 구멍을 찾으면서 망설이는 모습 말이다.

    그렇다고 의롭지 않은 것도 아니다. 어렵지만 어느 정도 하나님의 기준대로 살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제자화의 삶에 어느 정도 동참하나, 본인의 갈등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을 구원하기는커녕 본인도 간신히 구원의 대열에 선 경우 말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았으므로 어느 정도 안심은 하나 그 외의 성화의 삶의 도전에 있어서는 별로 열심을 내지 않으며, 목을 길게 빼고 세상적인 삶에 낙원이 있지는 않은지 바라보며 동참하고 싶어하는 삶의 모습 말이다. 문제는 불완전한 의로움, 불완전한 순종에 있는 것이다. 성경을 읽어 보면 아브라함의 삶이 멋있어 보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믿는 자들에게 당연한 것이나 실상에 있어서는 롯보다도 더 세상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경계를 삼아야 한다.

    둘째, 믿는 자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를 말씀에 비추어 비교, 평가, 비판하는 시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롯의 가족들이 소돔인들과 동화되어 산 것은 아니었다. 소돔인들이 롯에게 “이 놈이 들어와서 우거(寓居)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창 19:9)는 말 속에서 롯이 그들에게 여전히 이방인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베드로후서(2:7, 8)에 보면, 그 당시의 롯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그러나 롯이 그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지상명령 성취이며 이 사회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혁해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또한 성경에서는 “복(福)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즉 그런 무리들과 환경 속에서 계속적으로 홀로 유아독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불법을 행하는 악덕 기업주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거나, 옳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벌려는 자들과 동업을 하게 되었다거나, 하나님의 기준에 먼 삶을 사는 자들과 친구가 되었을 때는 냉정하게 말씀에 비추어 판단하고 평가해가면서 살아야 한다. 여기에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일방적인 정답은 없다. 자신이 거기에서 변화시킬 가능성이 없다면, 그리고 그럴 관계가 아니라면 소돔의 징벌을 생각하며 귀중한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기 전에 믿는 자들과의 교제의 품으로 빨리 돌아와야 한다. 점점 말세의 기운이 강해지는 이때에 우리가 속해 살고 있는 주위와 사회에 대해 성서적인 비판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된다.

    셋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결코 악이 승승장구하도록 방관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말세’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면서도 ‘설마 하나님이 그토록 무섭게 계시록대로 심판하실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정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독생자까지도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죽으셔야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도 언젠가는 심판 받을 것임을 알고는 있지만, 그러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리고 세상 가운데로 보내어진 자들이라는 것을 명심하며 살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의로운 자들에게는 자비로운 분이시다. 촌각을 다투는 심판의 와중에서도 지체하는 롯에게 “여호와께서 인자를 더하셨다.”(창 19:16)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도 롯과 같이 답답하게 굴 때가 많이 있다.

    언젠가는 사라져 갈 것들에 연연하여 삶을 지체하며 또한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인자를 더하고 계심을” 생각하며 더욱더 감사한 마음으로 믿음의 생활을 정진해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