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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받지 못한 여자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 레아(창세기 29:15∼30:24) -

    1. 성경에서 찾아보는 인물 연구

    레아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야곱이다. 그러나 야곱이 그의 삶 속에서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은 레아의 여동생 라헬이었다. 이러한 삼각 관계 속에서 레아가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29장 16절부터이다.

    “라반이 두 딸이 있으니 형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처음부터 라헬과 외모적으로 비교되어 나온다: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창 29:17) 안력이 부족하다는 뜻의 의미는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통해 어느 문화를 막론하고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표현을 생각해 볼 때 단순히 ‘시력이 나쁘다’라는 뜻 보다는 ‘눈에 총기가 부족했다’라는 뜻이 더 어울린다. 라헬과 대조적으로 묘사된 것으로 보아 레아는 단순히 눈만 아름답지 못한 것이 아니라 여러모로 라헬의 미모와 비교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당연히 야곱의 관심은 라헬에게 쏠릴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스토리에 지나지 않는다.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칠 년 동안을 봉사한다. 그 칠 년은 야곱에게는 즐거운 나날이었다.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창 29:20).”는 표현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다. 그렇게 기다렸던 야곱의 결혼식 날, 그의 기대와는 달리 라반(레아의 아버지요 야곱의 외삼촌)이 라헬 대신에 레아를 들여보낸 사건이 발생한다. ‘어떻게 자기 신부를 알아보지 못했는가’ 라는 질문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만큼 야곱은 신부가 바뀌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날 아침이다. 충격과 분노로 가득 찬 야곱은, 장가 가서 첫날밤을 지낸 신랑으로서, 장인어른께 드리는 조간 첫인사가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였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에게 추궁하신 질문과 똑같은 문장이다. 두 경우 모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한 강한 질책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 더해 ‘속였다’(창 29:25;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라는 말까지 더한다. 속임수의 대가(master)인 야곱(에서를 속이고 외삼촌 집으로 도망까지 온 야곱 아닌가!)이 어처구니없이 속임을 당한 것이다. 칠 년 동안의 수고가 다 허사가 되는 순간이다. 성경은 이런 순간에도 레아의 심정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한 여인에게 있어서 결혼이라는 것은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결정이요, 선택이요, 순간이다. 라헬을 원하는 줄 알면서도 동생을 대신해야 했던 레아의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왜 레아는 이 일에 참여했는가? 아버지에게 강요받아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는가, 못생긴 자기가 이렇게 해서라도 시집을 가야겠다고 택한 일인가, 아니면 은근히 야곱을 사모하고 있었는가, 거기에 대해선 알 길이 없다.

    약간의 힌트가 있다면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그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라는 라반의 말을 통하여 우리는 이것이 단순히 레아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라반의 이러한 말은 야곱에게는 뼈아픈 한마디가 아닐 수 없다. 아우와 형의 관계를 나타낸 이 표현은 야곱이 형의 축복권을 빼앗은 사건을 은근히 빗대어 시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레아의 결혼 생활은 시작된다.

    뿐만 아니라 칠 일 후 야곱은 원하던 라헬을 두 번째 아내로 맞게 된다. 가장 짧은 신혼기간을 보낸 여인의 한 사람이 레아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레아의 결혼 생활은 어떠했을까? 그녀의 동생 라헬과의 관계는 또 어떠했을까?

    흥미롭게도 성경에서는 레아의 심정을 그녀가 낳은 자식들의 이름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르우벤’인데 그 의미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다(창 29:32)’라고 표현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에서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보셨다(출 3:7)’와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사랑 받지 못하는 레아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첫 아들을 낳고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겠지’라는 희망을 가져본다(창 29:32). 둘째 아들은 ‘시므온’인데 여호와께서 아직도 야곱이 레아를 사랑하지 않음을 ‘들으셨다’는 뜻이다(창 29:33). 셋째 아들은 레위인데 여기에서도 레아의 간절한 소원은 ‘지금부터 내 남편이 나와 연합하리라’(창 29:34)는 것이다. 넷째 아들을 낳고는 비로소 많은 자손을 주신 ‘여호와를 찬송한다’(창 29:35)는 뜻에서 ‘유다’라는 이름을 짓는다. 이때까지 레아는 자신의 삶 속에서의 불행을 생각하느라 하나님께 감사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다.

    레아를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헬을 잠깐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 상황에서 라헬의 삶은 어떠했을까? 남편의 사랑을 받은 라헬은 과연 행복했을까? 라헬은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아 주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창 30:1) 자식을 낳게 하려고 야곱에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그녀 또한 자식이 없기 때문에 죽고 싶은 심정임이 잘 나타나 있다(창 30:1,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급기야 자기 시녀 빌하를 야곱에게 주어 ‘단’과 ‘납달리’가 태어난다. 라헬은 ‘내가 형(레아)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 라는 뜻으로 납달리의 이름을 지었는데 라헬의 심리 상태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레아도 이에 대응하여 지지 않고 자기 시녀 실바를 주어 ‘갓’과 ‘아셀’을 생산하게 된다. 두 자매가 다투어 경쟁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또 하나의 유명한 사건은 ‘합환채’의 사건이다(창 30:14∼21). 합환채는 본문에서도 뚜렷하듯 보통 여성의 생산 능력을 높여주는 데 유익하다고 알려진 식물이다. 여기에서 보면 레아와 라헬 사이의 알력이 잘 나타나 있다. 레아의 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왔는데 자식이 없어 불행했던 라헬이 레아에게 합환채를 팔라고 부탁한다. 레아의 반응은 그 동안 쌓였던 분노를 가히 짐작케 한다.: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창 30:15).” 마치 ‘네게는 남편이 있지만 내게는 자식이 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둘이 궁극적으로 합의한 교환조건은 레아가 야곱과 동침하도록 라헬이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그 동안 야곱이 레아를 가까이 하지 않고 라헬만을 총애했음을 짐작케 한다. 합환채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야곱을 원했던 레아의 간절함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해서 얻은 레아의 다섯째 아들이 ‘잇사갈’이다. 레아가 그녀의 시녀를 남편에서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창 30:18)’는 뜻으로, 사실 실바는 앞서 라헬 때문에 억지로 한 행위임이 시사되어 있다. 여섯 번째 낳은 아들은 ‘스불론’으로 ‘이제 그가(야곱) 나와 함께 거하리라(창 30:20)’는 열망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은 아이러니 자체다.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보다 상대방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더 원하는 두 여인의 운명을 보여준다. 레아는 라헬이 받는 사랑을 원하고 있고, 라헬은 레아에게 주신 자녀들의 축복을 원하고 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두 여인의 알력과 질투와 경쟁과 갈망 속에서 태어난 열두 자녀들이 후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중에 나오는 ‘형들이 요셉을 팔아 넘긴 사건’은 바로 그들의 어미들의 상황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요셉은 라헬의 아들이었고, 야곱의 요셉에 대한 편애는 라헬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아내 레아의 아들들조차 야곱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운명에 처한다.

    이러한 것이 형들의 요셉을 향한 미움으로 발전되는 배경을 만들었다. 그러한 면이 요셉 스토리 전체를 통해 잘 부각되어 있다. 이것이 레아의 결혼 생활이었고 한국식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의 ‘한(恨)’이었다.

    2.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신중한 결혼의 중요성을 배워야 한다. 레아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잘못된 결혼이 가져오는 슬픔과 비극이다. 물론 레아와 야곱의 결혼은 두 사람이 의지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통해 처음부터 문제가 있는 결혼 생활의 불행한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 우연히 결혼에 실패한 사람들을 만나볼 기회가 있었는데 대부분이 처음부터 본인들의 만남에 문제가 있었음을 고백했다.

    원하지 않았던 성적관계로 인한 포기성 결혼, 동정심이 유발되어 한 결혼, 물질적인 기대로 한 결혼, 성격적인 문제가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설마, 결혼하면 괜찮아지겠지.’ 라는 생각으로 한 결혼 등 이런 모든 잘못된 출발들이 결혼 생활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물론 출발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100퍼센트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인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지 않는 한 이미 극복해야 할 커다란 문제점들을 안고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힘이 들 수 있다는 것이다.

    믿는 젊은이들은 성경적인 결혼관과 목표를 잘 정하고 신중하게 기도하면서 각자의 배우자를 선택해야 한다. 자칫 세상적인 기준만을 따라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 향상을 목표로 결혼한다면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있을지라도 얻지 못하는 것 때문에 레아처럼 한을 품고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에 더해 또 다른 면은 성경에서 야곱이 두 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일부다처)을 직접적으로 비난하고 있지는 않지만 위에 언급된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원리(하나님이 보여주신 원리는 일부일처임;창 2장)를 어겼을 때의 결과를 보여줌으로 간접적으로 그 자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음을 보아야 한다.

    둘째,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의 요소가 있음을 보아야 한다. 레아의 사건 속에서 중요한 구절이 있는데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창 29:31)”는 표현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그것은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분의 주권에 속한 일’임을 가르쳐 준다.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다 자녀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러니컬하게도 합환채를 판 레아는 또 다른 자식을 얻었고 그것을 산 라헬은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다.

    오직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시어 그의 태를 열 때까지’(창 30:22) 그녀는 무자하였다가 그때가 되서야 비로소 그녀에게 처음으로 요셉이라는 귀한 자녀가 태어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아셨고, 그것을 보고 계셨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동생보다 못 생겨서 서러운, 동생이라고 속이고 첫날밤을 맞이해서 기구한, 또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해 처절한 한 여인의 삶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태를 여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위안이요, 복이다. 레아도 자신의 신세 때문에 넷째 아들을 낳고서야 감사하게 된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의문을 던질 수 있다.:‘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레아를 사랑하도록 만드시지 않았을까? 결국 그것이 레아가 원하고 기도하고 부르짖었을 기도제목이 아니었겠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우리의 짧은 생각이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레아의 결혼 생활은 시작부터가 해결될 수 없는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 야곱의 결혼 생활에서 한 사람의 행복은 결국 다른 사람의 불행일 수밖에 없다. 야곱이 설사 똑같이 조금도 차별을 두지 않고 공평하게 두 사람을 사랑하였을지라도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인간적으로 저질러 놓은 실수를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라고 애원하고 때로는 원망하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총을 발견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레아는 그녀의 자녀인 유다를 통하여 메시아가 탄생하는 특권을 얻게 된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발견할 때만이 우리는 그 속에서 위안을 얻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경험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인간은 죄 때문에 인간이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레아의 동생 라헬은 자신의 무자함에 대해 히스테리컬하게 반응하며(창 30:1), 자신의 시녀를 통해 자녀들을 얻게 되고, 레아도 거기에 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시녀를 통해 또 다른 자녀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레아는 일시적인 기쁨을 맛본다(창 30:10∼13). 그러나 그것이 레아를 정녕 기쁘게 하기보다는 레아 자신이 그것 때문에 또 다른 고통을 느꼈음을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창 30:18)’라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인간의 죄는 순간적인 만족을 줄지는 몰라도 그것이 궁극적 만족을 줄 수도 없고 결국 그것 때문에 고통을 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요 역사하심이다. 이런 복잡한 여인들의 질투와 묘한 심리 구조와 그로 인한 책략들이 오가는 ‘여인천하’의 가정구조 속에서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수많은 자손들과 이스라엘이라는 백성들의 조상들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들의 죄의 틈 사이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레아는 자의든 타의든 그런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남편에게 사랑 받지 못한 여자로 살았으나, 그러한 외부적인 불행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받고 살았던 여인이라 평가할 수 있다.

    공동집필 김윤희 박사·박성민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