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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사는 표현되어져야 합니다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두 빚진 자’의 비유 (눅 7:41∼50) 공관복음 중에서도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사역 대상들 중에서 특별히 사회의 ‘변두리’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소외된 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이 그려져 있다. 멸시당하는 다양한 죄인들(창녀, 죄인, 사마리아인, 삭개오와 같은 세리), 불쌍한 자들(아들을 잃은 과부, 문둥병 환자들), 가난한 자들, 또한 그 당시 소외층이었던 여인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쓰여진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번 비유도 그중에 ‘여인’이며 또한 ‘죄인’인 한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이 비유는 배경이 본문에 나와 있듯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심으로 시작된다. 예수님을 초대한 이 집의 주인인 바리새인과 그 잔치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등장하는 이 여인의 행위를 통하여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전개되는 가슴 적시는 장면들, 그러한 모습을 보며 오히려 역겨워하는 바리새인과 그러한 모습이 오늘의 비유를 통하여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1.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관찰

    안식일이었을 가능성도 있는 어느 하루 초대를 받아 찾은 예수님을 향한 주인 바리새인의 대접은 소홀함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손님을 맞을 때 환영의 ‘입맞춤’(서로의 관계에 따라 ‘볼’ 또는 ‘손등’에 하였음)도 없었고, 먼지로 뒤덮인 발을 닦도록 물도 주지 않았으며, 값도 싸고 가장 흔한 감람유로 그 분의 머리에 붓지 않은 사실은 그가 손님을 청해 놓고 ‘특별하게 행한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면이 강조되어 있다.

    그러한 대접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즐겼던 것같이 뜰에 차려진 테이블에 한 손을 얹고 발을 뒤로 한 채 식사를 하시려 앉아 계시는 때였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관심을 끌고 계시던 때라 그를 보기 위해 많은 동네 사람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바로 이때 ‘죄인’이라고 묘사된 그 동네의 ‘창녀’라고 여겨지는 여인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녀는 그 동네의 모든 이들에게 불청객으로 누구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었다. 그러한 여인이 예수님의 뒤에 왔을 때 그녀의 눈에서는 가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한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시었으며, 바로 이때 여자로서 가장 창피스러운 행위라고 알려진 자신의 머리를 다른 이들 앞에서 풀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발을 그 풀어진 머리털로 닦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에 더해 자신의 목에 걸고 다니던 귀한 ‘향유 담은 옥합’을 깨뜨려 그의 발에 붓는, 영화라면 매우 감동적이었을 장면이 펼쳐졌다.

    이러한 여인의 행위에 바리새인은 매우 불쾌하였다. 자신의 집에 ‘더러운’ 여인이 찾아왔을 뿐 아니라 여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까지 서슴지 않은 그 여인, 그리고 그러한 여인의 행위를 그대로 놓아둘 뿐 아니라 ‘즐기고(?) 있는 듯’한 예수님을 보며 “저 사람 선지자 맞아?”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을 때였다.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는 아주 짧은, 지극히 상식적인 답을 요하는 비유를 주시며 질문을 하신다. ‘빚 주는 자’가 오십 데나리온을 빚진 자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 모두 갚을 것이 없으므로(42절) 탕감을 해 주었다면 누가 더 그 사람을 “사랑하겠느냐?”라고 하신다. 이 질문의 답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연속하여 주어지는 예수님의 설명에 오해의 여지가 있음을 우리가 보아야 한다. “바로 저의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47절)는 말씀이 마치 그녀의 그러한 행동이 죄 사함의 결과를 낳은 것같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은 성경의 일반적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셨을 히브리어나 아람어에는 ‘감사하다’ 또는 ‘감사하는’이라는 의미의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러한 의미는 ‘축복하다(to bless)’ 또는 ‘사랑하다(to love)’라는 단어를 통해 ‘감사하는 감정’이 표현되어진다. 결국 42절에서 묻고 있는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라는 질문은 ‘누가 저에게 더 감사하겠느냐?’라는 의미이며, 47절의 ‘저(여인)의 사랑이 많음’이라는 표현도 ‘여인의 감사가 많다’라는 의미로 바꾸어 유사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이 여인의 행위 자체가 죄 사함으로 이끌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감사의 표시로 그 여인이 그러한 감동적인 행위를 하였다라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이것을 통해 바리새인도 귀한 교훈을 얻는다. 자신도 ‘갚을 수 없어 탕감을 받았으나’ 자신은 감사를 표하는 데 실패함으로 결국 영적인 장님으로 이 여인을 ‘용서 받은 죄인’으로서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2.이 비유를 통해 얻는 교훈

    이 두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하여 다음 세 가지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이 비유 속의 바리새인과 비교가 되고 있는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으나 탕감받은 사람을 통해 볼 수 있듯 자신에게 베풀어진 복의 상태를 당연시하여서는 안되며, 또한 자신들보다 더 큰 탕감을 받은 자들을 멸시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둘째, 오백 데나리온 빚진 것을 탕감받은 사람처럼 자신들에게 베풀어진 것에 대한 감사가 예수님을 향한 풍성한 감사와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이러한 모습은 오히려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이 비유 후반부에서 가장 강조가 되어 있는 점으로 ‘감사는 표현되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셋째, 이 비유 속의 ‘빚 주는 사람’처럼 하나님은 범주와 부류에 관계없이 모든 죄인들을 용서하시며 깨끗한 상태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함으로 어떠한 ‘죄인’일지라도 ‘용서된 죄인’(forgiven sinner)이 될 수 있다.

    3.이 비유의 교훈과 우리의 현실

    사랑은 표현되어질 때까지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사실 모든 것이 표현이 되어질 때 그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는 평범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말이다. 위의 비유를 통하여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죄의 용서함을 경험한 한 ‘창녀’의 감동 깊은 감사의 표현은 우리 모두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치고 있다.

    이 여인은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값비싼 향유와 여자로서의 자존심을 드림으로 그 분을 향한 감사를 표현하였다. 그러한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각자의 경우를 점검해 보도록 요구하고 있다. 혹시라도 언제부턴가 모든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며 감사를 표현하는 각자의 모습이 ‘입술에 국한된’ 모습으로 되어버리지 아니하였는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감사를 표현하는 것의 중요성은 다른 면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감사가 없는 신앙생활, 감사가 말라버린 신앙생활은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위의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삶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주위에서 그렇게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이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시기하게 되며,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복을 과소평가하려 하며, 남들의 실수와 잘못을 찾는 것을 기뻐하고 고소하며 고발하며 정죄하는 모습으로 전락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를 표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결코 손해보시지 않는다(물론 섭섭하실 수는 있겠지만)는 사실을 생각하여 보면 결국 감사 표현의 궁극적인 수혜자는 우리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진정한 용서의 체험은 감사로 표현이 되어지는 것이 당연하며, 감사는 표현될 때까지 감사가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을 주시고 계신다. 거꾸로 말한다면(그렇지만 매우 조심스럽게) 표현되어지지 않은 감사란 존재할 수 없듯이 감사가 없는 용서란 진정 경험된 용서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각자에게 물어보자. ‘나는 용서의 체험을 하였는가?’ 아니 ‘나는 용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하였는가?’라고 말이다. 감사는 표현되어져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하며 이와 같은 질문을 던져보는 하루하루가 되어지기를 기대한다. 오늘 하루 나는 감사를 어떻게 표현하며 지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