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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의 예산 심의를 해보셨습니까?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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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 14:28-33절의 "비용을 세어보라"는 주제를 가진 "쌍둥이비유" -
이 두개의 비유는 상대적으로 매우 독특한 성격을 지닌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으실 때의 말씀인 "믿음"이라는 조건 한가지에 근거하여 "좇으라"라는 상대적으로 익숙한 메시지와는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곳에서는 그의 제자로 헌신한다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러한 삶이 요구하는 희생과 비용을 세어본 후 좇으라"는 '신중한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을 향해 신중한 결정을 하는 것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가르치고 있다.
1. 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관찰
"망대를 세우고자 하는 자"의 비유는 우리에게 "비용을 계산하여 보라"는 것을, 또한 "전쟁을 결정하는 왕"의 비유는 우리에게 "전쟁에서 이길 확률 또는 그것을 치루는 데 드는 희생과 비용을 계산하여 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두 비유 모두 비용(재정 또는 재정과 생명)이 많이 드는 프로젝트에 뛰어 드는 것의 위험함과 함께 현실적인 사전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가르침을 제자도와 연결시키어 생각하며 보면 그러한 삶에 헌신하기 이전에 그러한 삶을 사는데 요구되는 "비용"을 계산이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 비유가 주어진 앞뒤의 문맥을 통해서 분명하듯 제자도의 비용은 26절의 말씀인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하며, 33절의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는 두 말씀을 통해 제시되어 있다.
그럼 위의 표현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여 보자. 먼저 전자의 표현과 연관하여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과 "가족에 대한 책임의 중요성"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가를 분명히 하여야 한다. 이 것에 대한 가장 올바른 이해는 "변혁을 일으키는 사역"인 예수의 제자의 삶이 다른 무엇 보다도 우선하여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눅 9:59-60에서 말하는 부친을 장사한 후 좇겠다는 자를 향해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은 전혀 이상한 가르침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부친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불감증을 가지고 계신 모습이 아니며, 오히려 이 말씀을 통해 이 변혁을 일으키는 사역의 중요성과 긴급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음 표현인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라는 표현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필요하다. 이 것은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버린다는 표현으로 볼 수 없다.
물론 때로는 어떠한 개인(예: 누가 복음 18:18-23의 어떤 부자 관원)에게 이러한 도전을 하셨다. 그러나 모두에게 그러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셨다는 것과 함께 그를 좇기로 결정한 모두가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예: 누가 복음 19:8-9의 삭개오). 그러나 어떠한 경우이던 간에 같은 원리는 존재한다.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온전하며 헌신된 사역을 가로 막고 있는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 것은 버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26절의 "미워한다"는 표현이 문자적 의미에서 미워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와 우리 삶의 중심의 위치 쟁탈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듯이 여기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고 있는 다른 것들의 존재를 부정하여야 하는 제자들을 향한 요구를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2. 이 비유를 통해 얻는 교훈
이 두 비유의 가르침을 제자도라는 주제와 연계시키어 두 가지의 두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예수의 제자는 먼저 제자도에 대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도는 "단순한 겉보기 만의 감정"이나 "얄팍한 열정"에 근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우리 가운데 있다가도 손쉽게 없어져 버릴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남들이 하니까 나도"라는 생각으로 손쉽게 생각되어 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중한 심의와 평가를 요구한다.
둘째, 예수의 제자는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도에 관계된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그에 따르는 비용을 분명히 발견한 후 그를 좇기 때문에 그분과의 관계가 제일이 되며 그로 인해 다른 모든 관계는 (심지어 가장 우선된다고 생각되며 양보 되어질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관계가 있을 지라도) 우선 순위에서 2순위로 밀려나갈 수 있어야 한다. 눅 14:26, 27, 33절에서 반복이 되는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보는 것이 요구된다. 이 표현을 긍정적으로 하자면 비용을 세어보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져버릴 수 있다는 각오를 한 사람만이 헌신된 제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위의 원리들을 단순한 각도로 바라보면 마치 제자가 되는 것을 억제하고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 보면 이 비유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을 단념시키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헌신된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가"를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은 "변혁"을 일으키는 제자의 사역에 일부만이 헌신된 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온전히 헌신한 자들만을 찾고 계신다는 것이다.
3. 이 비유의 교훈과 우리의 현실
오늘의 두 비유 중에서 특별히 첫번째의 것은 경부 고속철도를 지으며 부실 공사와 미진한 진척으로 인해 천정부지로 올라버린 비용 때문에 원래의 공사 목표를 수정하며 또한 이미 들여와 "놀고 있는" 고속 열차를 보관하게 만든 우리 정부의 "미흡한" 정책을 생각나게 만든다. 조심스레 계획하며 세밀한 검토와 예산 편성은 무슨 일을 하던 간에 절대적으로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배워야 한다. 세상일도 그리한대 하물며 "변혁을 초래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제자의 삶은 더욱 더 그리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성격을 지닌 제자의 삶은 단순히 세상 속의 삶에 업히어진 여가활용 차원의 행위가 될 수 없으며 클럽이나 동아리 같은 것과 같이 취급되어 질 수도 없다. 오직 예수님의 삶 속에서 발견되어 지듯 "예외 없이 모든 것"을 온전하게 헌신 되어진 모습이 요구되어진다. 결국 제자의 삶이 추구하는 "변혁을 초래하는" "엄청난" 목적을 위해 "엄청난" 비용을 세어볼 것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비유들을 통해 강조되어 있는 그 변혁의 삶의 결과인 영광과 상급의 약속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함께 가르치고 있다. 오히려 영광과 상급을 세어볼 뿐만 아니라 그 것을 얻기 전에 감수하여야 하는 고난과 어려움을 생각하여야 한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제자도의 예산심의를 한 후에 시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의 제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들을 향해 그 삶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방법을 이 쌍둥이 비유를 통해 제시하고 계신다. 우리 각자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자. "왜 예수의 제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였으며 또한 왜 원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곳에서 강조된 감수하여야 될 희생에 대하여 세어 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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