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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다른 큰 민족의 어미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 하갈(창세기 16:1∼16; 21:8∼21) -

    1. 성경에서 찾아보는 인물 연구

    하갈의 삶 속에서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여인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 속에서 이름난 주연인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일 것이다. 처음부터 사라에 의해 그녀의 운명이 좌지우지 되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갈의 신분은 사라의 여종이었다(창 16:1). 그런 그녀에게 신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사라의 인내심 부족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약속하신 지 십 년이 지나도록(창 16:3) 전혀 태기가 없자 사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간단히 해결하고자 주도권을 잡고 나섰다. 그것은 자신의 몸종을 통하여 자식을 얻는 방법이었다. 야곱의 아내 라헬도 이런 방법으로 자식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다고 나와 있는데(창 30:3), 당시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르면 사라의 이런 행동이 비도덕적이거나 사회적으로 지탄 받을 일이 아닌 자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허용되던 풍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조차도 별 저항 없이 사라의 제안에 수긍해버린다.

    이런 상황 속에서 창세기 16장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소개되는 인물이 하갈이다. 그녀는 먼저 ‘애굽 사람’임이 두 번씩 강조되어 있다(창 16:1, 3). 창세기 15장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15:4)라고 말씀해 주심으로 앞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애굽에서 종노릇하게 될 일을 미리 계시해 주신다.

    그러나 또한 그의 자손이 언젠가는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까지 차지할 것임을 가르쳐 주심으로써(창 15:18) 애굽과의 관계가 다시 언급되어 있다. 이렇게 이스라엘 국가와 앞으로 운명적으로 뒤엉키게 될 바로 그 애굽 나라의 여인이 여기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 사라의 종의 신분으로 등장한다.

    순수하게 사라의 주장 때문에 하갈은 아브라함의 첩이 된다(창 16:3).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는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창 16:4)는 표현에서 간단하게나마 엿볼 수 있다. 왜 그런 사람들 있지 않은가? 조금 출세하면 자신의 과거의 신분은 잊어버리고 쉽게 교만해지는, 조금은 유치한 사람들 말이다. 하갈도 임신을 통하여 사라와 동등하다는, 아니면 그녀보다 자신이 조금 더 우월하다는 착각을 가지고 행동할 정도로 단순하며 그것을 사라에게 나타낼 정도로 외교적이지 못한 어리석은 면이 있는 여인이라고 분석된다. 전형적인 단무지(단순, 무식, 지혜 없음)형의 인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멸시하다’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고 약속하신 말씀에서 ‘저주하다’와 같은 단어이다.

    그것은 하갈의 운명이, 그녀가 종이냐 첩이냐의 신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 아브라함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시사되어 있다.

    사라도 지지 않고 여기에 대해 하갈을 ‘학대’함으로 응수한다(창 16:6). 여기에서 ‘학대’라는 표현은 위에서 언급한 창세기 15장에 이스라엘이 사백 년 동안 ‘괴롭힘을 당한다.’(창 15:13)는 표현과,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학대’를 받았다는(출 1:12) 표현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후에 이스라엘이 애굽에게 받는 학대를 여기에서는 애굽 여인 하갈이 이스라엘 여인 사라에게 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하갈이 사라를 ‘멸시’(저주)하였기 때문이다. 학대를 받자 이스라엘이 도망한 것처럼(출 14:5, 백성의 도망한 것을) 학대를 받은 하갈도 도망한다. 사실 ‘하갈’이라는 이름은 ‘도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본인의 이름대로 행동에 옮긴 것이다. 술(창 25:18, 애굽 앞 술)길 샘물이라는 표현 속에서 하갈이 자신의 본국인 애굽을 향하여 도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망쳐 나온 하갈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뜻밖에도 여호와의 사자였다.

    사자는 하갈에게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手下)에 복종하라고 명한다. 여기에서 ‘복종하라’는 단어는 원어로 보면 ‘학대 받다’와 같은 단어로써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사라의 ‘학대 밑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하갈 자신이 저지른 ‘멸시’의 대가를 치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는 비록 그녀의 자손이 약속의 자손은 아닐지라도 복 주실 것을 약속한다: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창 16:10).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에게 주신 복과 동등한 것이다(12:2; 15:5).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갈이 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거나 그녀가 단순히 학대 받는 처지에 있는 ‘억눌린 자’이기 때문에 불쌍해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며 그 약속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주시는 것이다(창 12:3). 하갈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임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속한 자들만이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제 그녀가 사라에게 돌아가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한 전제 조건인 것이다.

    그리고 하갈의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어 주신다. 그 의미는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창 16:11)고 말씀하신다. 원어로 보면 ‘고통’은 ‘학대’라는 단어와 같다. 그녀의 학대 받는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애굽에게서 받는 학대도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을 시사한다(출 1:12).

    그러나 하나님이 복 주시되 하갈의 자손은 약속의 자손과 삶의 방식에 있어서 구분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하갈의 자손은 광야에 거하며 거칠고 호전적인 삶을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창 25:18, 그 자손들은…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하였더라). 여기에서 하갈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부른다. 즉,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는데 ‘나를 감찰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갈의 신앙 고백과도 같은 것이다.

    이방 여인이며 종의 신분에 불과한 하갈, 주인의 첩으로 부상되었지만 여전히 아무런 힘이 없는 하갈, 임신을 통해 그나마 조금이라도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켜 보고자 철없이 조금 으쓱하였다가 여주인에게 혹독히 당하는 하갈과 같은 여인을 ‘들으시고’,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난 사건이 그녀의 삶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는 놀라운 축복의 약속도 받았다. 그것은 그 자손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겠다는 창세기 12장(12:2)의 약속의 말씀을 성취해 가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 하갈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라에게 돌아가 이스마엘을 낳게 된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뜻으로 사실 사라와 하갈 사이에 있었던 갈등관계를 영원히 증거하는 사라에게는 뼈아픈 이름이다. 16장 전체를 평가해 볼 때 사라는 건진 것이 하나도 없다. 남편과는 다투었고(창 12:5), 하갈에게는 멸시를 당했고, 그나마 그녀를 통해 얻으려던 자식마저도 이제는 수포로 돌아가버린 상태이다(창 16:10, 네 자손 하갈의 자손이 됨). 이것을 통하여 본문에서는 사라의 결정이 잘못되었으며 그녀의 방법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창세기 16장의 사건과 21장의 사건은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21장은 16장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어떻게 성취되어지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16장의 사건이 하갈과 사라 사이에서 발단이 되었다면, 21장의 사건은 하갈의 아들과 사라의 아들 사이에서 발단이 된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戱弄)하는지라”(창 21:9).

    구체적으로 어떠한 종류의 희롱이었는지는 몰라도 이번에도 사라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사라는 이 기회에 자신의 아들의 권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하갈과 그 아들을 쫓아내기를 아브라함에게 요청한다. 사라는 ‘이 여종과 그 아들’, ‘내 아들 이삭’이라는 표현으로 철저히 ‘이스마엘’이라는 단어를 피하고 사용하지 않으며 앞으로 기업을 물려받을 자기의 아들과 뚜렷한 구분을 둔다.

    그동안 두 사람의 관계가 개선되기는커녕 사라가 이삭을 낳음으로 더 악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번에도 사라가 주도권을 잡고 그 둘을 내어쫓으라고 요구한다. 이 일에 근심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두 아들에게 각기 다른 계획이 있음을 밝히시고 결정을 내리도록 허락하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창 21:12∼13).

    여기에서도 보면 누구도 하갈을 위해 염려해 주는 자는 없다. 아브라함도 ‘아들 때문에’(그 아들을 위하여)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아브라함이 음식과 물을 주어 그 두 사람을 내어 보낸다. 사실 쫓겨난 종과 그 아들의 신변의 안전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갈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니요 생계수단이 뚜렷이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하갈은 방황하다가 길을 잃고 물이 떨어져 죽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에 다다른다. 누구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곳에서 두 모자가 겪는 처참한 모습이 본문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하갈은 물이 다하자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화살 한 번 쏠 수 있는 거리만큼 떨어져 방성통곡하기 시작한다. 이 표현은 후에 아이가 자라 ‘활 쏘는 자’(창 21:20)가 되었다는 것과 연결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두 모자를 보고 계셨고 그들의 통곡소리를 들으신 분께서 하갈에게 다시 한번 전에 해 주셨던 약속을 상기시켜 주신다: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창 21:18).

    전에 샘물 곁에서 하갈을 만나셨던 그 분께서(창 16:7) 이번에는 하갈의 눈을 밝히셔 샘물을 보게 하심으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아이와 함께’ 계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하갈은 단순한 종의 신분에서 약속의 자손은 아니지만 이삭과 대등한 또 다른 큰 민족의 어미로 부상한다(창 25:12∼18).

    2.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쳐 준다. 그 분은 우리를 ‘감찰하시는’(보고 계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들으시는 분이시며, 또한 그 분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시다. 사라가 하갈에게 행한, 여주인으로서 정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당하는 자에게는 고통스러운 그런 미묘한 일들, 한 가정의 구석에서 일어나는 조그마한 사건들, 대부분의 남편들조차 귀찮아서 피하고(아브라함도 그랬음) 싶은 여자들끼리의 심리적인 피해 상황들, 이런 모든 것들을 보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방 여인이며, 종의 신분인 하갈의 고통을 들으시고 그녀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시는 하나님, 그 분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기 위해 그녀의 아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21:20),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모두의 삶 깊숙이 들어와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과연 누가 억울한 것인가를 알고 계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중요하고 위대하고 큰 일에만 관여하신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하갈의 사건은 작은 일에도 상처받기 쉬운 어리석은 우리들 모두에게 큰 위로가 된다. 이것의 또 다른 국부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열심히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mistress)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시 123:2)는 시편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는 연습을 열심히 해야 한다.

    둘째,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 일을 성취하려는 것은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라는 약속의 자녀를 낳기 위해 하갈을 이용했다. 그 결과는 세 사람(아브라함, 사라, 하갈), 아니 이스마엘과 이삭까지 포함하여 다섯 사람 모두 고통을 받았으며, 더 나아가 오늘날에도 문제가 되고 있는 중동사태, 이슬람과 기독교와의 갈등의 뿌리 역할을 하고 있다. 사라는 문제를 일으켜 놓고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희생이 된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주신 동등한 복을 주셨다.

    그러나 이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이 두 민족 사이의 갈등은 계속 되어질 것이다. 우리의 삶을 보더라도 우리의 머리 속에서 계산적으로 일들을 처리해 놓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할 때가 많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인간적인 실수들이 드러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흔히 위로들을 삼는다. 그러나 많은 것들이 하나님의 연단하심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초래한 것이며 그럴 때 우리는 그 대가를 치를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복 받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하갈이 도망쳤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학대의 그늘로 다시 돌아가라고 명하신다. 하갈은 자신의 방법인 ‘멸시’(16:4)로는 사라와 동등됨을 누리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에 복을 누리며 종의 신분에서 한 큰 민족의 어미가 되는 비로소 사라와 동등된 위치에 서게 된 특권을 누리게 된다.

    우리의 삶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결국 힘들더라도 말씀의 원리대로 순종하여 사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