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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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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님의 삶 속에 나타나 있는 제자도의 파라다임'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
    태복음을 진행이 느린 영화로 비유한다면, 마가복음은 그와 대조로 템포가 매우 빠르며 액션으로 가득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마가복음은 사복음서 중에서 가장 적은 지면을 차지하나,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같은 사건들을 비교하여 보면 가장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생생한 표현들과 함께 과거의 사건들을 현재형 시제를 통하여 표현함으로써 사실상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구속의 드라마 현장 장면 속으로 들어올 것을 초청하고 있다. 그는 그러한 초청을 통하여 그의 "작품" 속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은 최소한 두 가지의 연결된 사실들을 발견하기를 원하고 있다. 바로 마가복음의 가장 강조점인 예수님이 '고난 받는 하나님의 선택된 종'이라는 사실과 그와 연계된 '제자도'의 가르침이다. 이 두 가지의 연결성을 염두에 두고 마가 복음을 통한 제자도의 원리를 찾아 보기로 하자.

    1. "잘 나갈" 듯하게 보였던 제자들의 추락상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마가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심을 초기 단계에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그 분이 "원하시어"(3:13) 택함을 받은 자들로 예수님과 함께 하며, 보내어 전도도 하며, 또한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부여 받은 자들이었다 (3:14-15). 이러한 면모는 6장에서 열 두 제자들의 선교 여행을 둘러싼 모습 속에서도 여실히 보여진다 (6:7과 6:12). 제자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능력 있고 승리하는 훌륭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잠간의 "잘 나갈" 듯한 모습은 곧 하강세로 급변한다. 오병이어의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마음이 '둔하여졌으며' (다른 곳에서는 불신자들에게 쓰여지는 강도 있는 표현) (6:52. 또한 8:17),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깨달음이 없는 자들로 평가되며 (예: 7:18; 8:17-21), 그 중에서도 8:4절에서 보여주는 6장에서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너무나도 감쪽같이 잊어 버린 그들의 응답인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8:4)라는 질문은 우리들로 하여금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8:21)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답답한(?) 마음을 엿보게 한다.

    이러한 모습은 제자들의 삶 속에서 권능의 부재로도 나타난다. 결국 6장에서의 귀신도 쫓아내는 승승장구하는 모습과는 대조로 9:18절에서는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라는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의 호소는 그 들의 추락된 모습을 더욱 실감케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무능함으로 그치지 않고 그에 더하여 발견되는 제자들의 '철없는' 요구와 반응은 독자들로 하여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가장 단편적인 예는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주어지는 예언과 그 다음에 기록이 되어 있는 제자들의 반응이다.

    첫번째 예언을 향해 예수님을 오히려 "꾸짖는" (헬라어 본문의 의미) 베드로 (8:31절 이후), 두 번째 예언을 둘러싸고 있는 제자들의 '누가 크냐'라는 쟁론 (9:30절 이후), 세 번째이자 마지막 죽음에 대한 예언의 말씀에 연이어 나오는 야고보와 요한의 '영광을 받으실 그리스도'의 좌우에 앉는 영화를 누리게 해달라는 '어리석은 요구'는 '그리스도의 제자'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것이 이들의 실패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마가는 우리에게 직,간접으로 시사하고 있다. 마침내 십자가의 사건 앞에서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는 제자들의 모습(14:50)을 기록하며, 저자 마가는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발가벗은 몸으로 도망하는 정체 불명의 한 청년의 모습을 연이어 더함으로써 제자들의 조금도 남김없는 '완벽한 실패'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4:50-52). 그야말로 "잘 나갈" 듯하게 보였던 제자들의 "모라토리움"(moratorium) 선언인 것이다.

    2. "부실한 경영"으로 제자도의 "부도"를 맞아 버리게 된 근본적 원인

    제자들의 추락을 설명하며 복음서의 흐름과 또한 말씀 속의 구조를 통하여 저자는 그 들의 문제점을 우리 모두가 발견하기를 원하고 있다. 특별히 세 번씩이나 주어지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예언들과 그 때마다 예외 없이 대조가 되어 있는 제자들의 "완벽한" 넌센스는 원인 분석을 하는 우리에게 열쇠를 제공한다. 특별히 첫번째 죽음 예언 후 예수님을 꾸짖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곧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8:33)라는 평가를 받는다. 바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생각과 시각으로 보지않고 사람들의 안목으로 대신하려는 그 들의 모습이 이러한 모든 몰이해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예언 다음에도 반복이 되어지고 있으며 특별히 10:41절에서의 열 제자의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에 대한 분한 태도가 이들의 현주소이다. 인간적으로 바라보며 인간적인 기준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특권을 해석하려던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도전을 하신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10:45). 바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영화와 부귀만을 누리며 군림하는 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생각은 바로 남을 위한 희생과 섬김의 삶이며, 십자가의 삶이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생각을 잃어버린 채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하며 살아가는 제자도는 "부실한 경영"이며 결국 "방만한 삶"으로 이끌 수 밖에 없음을 저자 마가는 가르쳐 주고 있다.

    3. 그들의 실패는 우리의 "성공"의 거울

    저자 마가는 제자도를 가르침에 있어 잘못된 제자도의 위험함에 관하여 경고와 치료 방법만을 단순히 제시하기 보다는 열 두 제자들의 실패의 본보기를 통하여 교훈을 주는 극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다. 이들을 보며 그들의 "한심함"만을 본다면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하여 주시는 신학적 의미를 배우지 못하며 결국 그 들의 실패의 전철을 밟는 똑같은 자들이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는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위에서 이미 언급되었듯이 마가 복음 속의 기독론과 제자도는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좀더 직접적인 표현을 쓴다면 마가 복음 속의 예수님의 삶 자체가 바로 우리들에게 제자도의 올바른 삶에 대한 '청사진'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제자도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갖기 위해서, 우리는 제자들을 보기보다는 바로 예수님의 삶 자체를 제자도의 파라다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마가복음에서는 적어도 제자들이 우리의 모델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모델인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삶을 통해, 마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자들의 삶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것을 생각하며 사는 삶 (8:33), 믿음과 그 믿음 위에 근거하는 기도의 삶 (9:29), 또한 죽음까지도 감수하는 섬김의 삶 (10:45)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것에 근거한 견해로써 제자도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예수의 제자들에게 용납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마가는 우리에게 위와 같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 것은 마가 복음 속의 제자들에게 일어난 것과 동일한 것으로 바로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다. 즉, "어리석은" 모습의 제자들에게 역사적 십자가 사건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의 삶에 대한 참다운 이해가 가능하였듯이, 십자가 사건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십자가 사건의 '실존적' 경험과 이해를 통하지 않고는 결국 그들의 실패를 답습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십자가'가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제자도라는 주제와 연결하여 각자에게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당신은 십자가를 통하여 정의된 제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