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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절이 변하듯 종말도 분명할 것입니다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무화과나무의 비유(마 24:32∼35; 막 13:28∼31; 눅 21:29∼33)-

    이 비유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먹는 상대적으로 흔한 과일나무에 속한다. 성경 속에는 신구약을 통틀어 무화과나무가 60번 가깝게 언급되어 있으며, 솔로몬의 전성시대에 누렸던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도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 4:25, 비교: 미 4:4)는 표현을 쓰고 있다. 또한 마태복음 21장 1절에 언급 되어있는 예루살렘에 근접한 곳의 지명인 벳바게(Bethphage)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화과나무의 집(house of fig)’이라는 사실 또한 무화과나무가 그 지역 사람들과 얼마나 친숙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무화과나무는 보통 5m 정도 높이로 자라는데 때로는 8m까지 다다르며 잎이 무성하여 태양 빛이 강한 팔레스타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하여 주고 있다. 이 나무의 특성을 통한 가르침은 4계절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의미있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1.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관찰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핵심 구절(마 24:33; 막 13:29; 눅 21:31)에 포함된 ‘이런 일(these things)’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세 복음서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제자들의 질문(마 24:3; 막 13:4; 눅 21:7)을 염두에 두고 보아야 한다. 이 비유 자체를 살펴볼 때 가르침의 핵심은 ‘인자의 재림(마태와 마가복음)’ 또는 ‘하나님 나라의 온전히 임함(누가복음)’에 앞서서 나타나는 종말의 징조들(these things)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잎이 없던 가지에 푸른 잎이 나듯이 분명할 것이다.’ 라는 단순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이 단순한 가르침을 주어진 문맥과 연결하여 생각하여 보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이 비유는 공관복음에서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는 곳인 마태복음 24∼25장, 마가복음 13장, 그리고 누가복음 21장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세 복음서 모두 예외 없이 종말에 대한 징조들을 말씀하신 후 ‘인자의 재림’이 있을 것을 언급한 후에 이 비유가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하여 보아야 한다.

    가장 먼저 논할 수 있는 쟁점(issue)은 싹이 난다라는 표현을 성경 속의 일반적 이해와 연결시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엘 2장 22절(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에서도 발견할 수 있듯이 이 표현은 ‘비극과 어려움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축복과 구원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이 땅의 종말이 가까울수록 기독교인들이 핍박과 어려움을 당할 것이나, 그러한 것들은 종말의 순간에 온전한 상급을 받는 순간으로의 전환임을 시사하고 있다. 결국 종말의 순간은 모든 믿는 이들이 기대하며 기다려야 하는 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표현은 해석상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다. ‘이 세대(this generation)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all these things)이 다 이루리라’(마 24:33; 막 13:30; 눅 21:32)라는 구절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이 난해한 표현에 관한 이해를 돕는 것으로 쿰란이라는 곳에서 발견된 종말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문서들이 있다. 그 문서들을 연구한 결과 ‘이 세대’라는 표현은 단순히 어느 사람의 한 ‘생애’로 이해하기보다는 ‘끝까지 견디며 충성된 무리들’을 총칭하여 가르키고 있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해 ‘이 세대’라는 표현 속에는 비유를 들은 제자들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격한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 시대와 연결된 예언의 성취를 기대하며 사는 모든 믿는 이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마치 선지자 엘리야의 시대에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7천의 의인들이 있었듯 충성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 속에서 발견되는 도전의 말씀인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와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막 13:20)는 말씀 등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2.이 비유를 통해 얻는 교훈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가르치시는 교훈은 종말은 예수님의 말씀같이 분명히 우리에게 온다는 것이다. 이 종말의 징후는 마치 자연의 변화를 통해 누구나 계절의 변화를 느끼듯 분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이 비유의 가르침을 앞서 기록된 종말의 징조와 그 후에 연속되는 가르침과 연결하여 본다면 다음과 같은 생각의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종말 자체와 그 징조들의 분명함과는 대조적으로 그 날과 시에 관하여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믿는 이들은 항상 깨어서 그 날을 준비하고 살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그 종말의 임함은 인간들의 일반적 생각과는 달리 급하게 또한 전혀 예상치 않을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3. 이 비유의 교훈과 우리의 현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나 사회적으로 불안할 때 ‘종말의 순간이 다가왔다’라는 거짓 메시지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무리들이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분적으로 인용’하거나 또는 그것을 ‘그럴듯하게 조작’하여 자신의 거짓 주장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위와 같은 자들의 주장과 같이 분명 이 세상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 순간은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과 함께 그 분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기쁨과 환희의 순간이 될 것임을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러한 종말의 임함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어느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알도록 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늘의 비유에서 가르치셨듯 마치 계절의 변화가 모든 이에게 뚜렷한 것처럼 종말의 순간으로 인도하는 징조들은 확실할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요약하자면 종말의 순간이 언제가 될지 누구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임할 때는 모든 것이 분명할 것임이 강조되어 있다.

    우리들에게 종말의 가르침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예: 마 24:44; 막 13:33; 눅 21:34). 그 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를지라도 이 세상의 종말의 확실성과 분명성을 인식하며 우리의 삶의 자세를 점검하며 준비하는 태도가 필요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지구 환경 문제로 생태계의 심각한 파괴, 자연의 순리를 역행함으로 기인한 ‘광우병’의 공포, 유전자 조작으로 인한 무시무시한 잠재적 부작용 등으로 부각되고 있는 소위 ‘자연의 보복’이라 일컬어지는 사건들이 심각해짐에 따라, 또한 종교다원주의의 만연으로 인한 ‘거짓 가르침’이 부상함에 따라 이 종말의 문제는 더욱더 우리들에게 근접하게 느껴질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각도에서 볼 때 로마서 13:11∼12의 말씀은 우리 모두를 향한 권고이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며 살아가자. 종말의 확실성이 오늘 하루 나에게 어떠한 도전과 변화로 인도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