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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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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금만 더 참아 주옵소서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실과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눅 13:6~9)

    우리나라 농촌의 집들처럼 적당한 터가 허용되는 대로 과일나무를 심는 것이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상황이었다. 그 중에서도 무화과나무는 그 열매가 우리 나라의 곶감과 같이 건조, 저장이 가능하며 그 지역에서 잘 자라고, 심지어는 10개월 동안이나 열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선호하는 과일나무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흔히 발견할 수 있었던 무화과나무를 심을 때 당연히 기대되는 열매와 연결하여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중요한 가르침들을 주고 계신다.

    1. 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관찰

    먼저 주목할 것은 이 비유로 이끄는 문맥의 중요성이다. 이 비유는 1절부터 시작되어 5절까지 이어지는 회개(repentance)의 중요성과 연결되어 있다. 1절에서 언급된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갈릴리인들이나, 4절과 같이 ‘운이 나빠’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넘어져 망대에 깔려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향한 그 당시 일반적인 생각은 지금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큰 죄’를 지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이해와는 다른 말씀을 전하고 계신다. 2절과 5절에서 반복하여 말하고 있듯 죽음을 당한 자들의 죄가 살아있는 자들보다 더 큰 것이 아니며, 살아 있는 자들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그들과 같이 망한다는 것이다. 즉, 모두가 동일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함께 회개하지 아니하면 누구도 예외 없이 심판을 당할 것임을 분명히 가르치고 계신다.

    이러한 가르침과 연결하여 말씀하신 비유가 위의 비유이다. 이 무화과나무는 심은 후 6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열매를 맺지 않으면서 오히려 땅의 양분, 수분과 지력만 낭비하고 있는 나무의 모양을 그려주고 있다.

    이 비유와 연결하여 크게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주인과 과원지기는 누구를 상징하고 있는가, 둘째, 무화과나무는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가, 즉 누구를 상징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 주인과 과원지기의 관계를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로 보는 데는 문제가 있다. 마치 성부 하나님은 심판과 진노의 하나님이시며, 성자 하나님은 자비와 용서의 하나님이라는 초대 교회의 마시온(Marcion)이라는 이단의 주장과 유사하게 되어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주인과 과원지기는 심판자 되시는 예수님과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주님의 제자들’의 모습으로 연결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둘째 질문에 대한 답은 구약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일반적 이해와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나타낼 때 일반적으로 포도원과 포도나무에 비유하였다(사 5:2, 렘 2:21, 호 10:1). 이 때문에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나타내기보다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실 때 위의 주장과 같이 특정한 대상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을 가능성은 13장 34, 35절(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과 연결해 볼 때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훼파가 마지막 종말의 징표에 불과하듯, 이 비유를 통한 경고는 보편적으로 모든 이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메시지로 보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결국 이 비유가 본래는 어느 특정층을 겨냥한 경고였을지 모르나, 궁극적으로 모든 이들을 향한 회개를 요구하는 경고성 메시지라고 보는 데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게으름과 열매 맺지 못하는 모습(inactivity and unproductivity)은 어느 누구라도 간과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비유는 경고의 메시지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보아야 한다. 바로 과원지기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위해 주인에게 한 해 더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며 특별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것을(8절) 약속하는 부분에 그 강조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구에 대한 주인의 ‘무언의 허락’은 제자의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 회개치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가져야 할 태도를 가르치고 있다. 회개치 않은 이들에게 임할 심판의 메시지가 보편적이라면, 제자의 삶을 사는 자들에게는 한 사람의 생명도 멸망치 않도록 사랑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노력 또한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이 비유를 통해 얻는 교훈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과수원 주인을 중심으로는,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나라의 백성들이 열매를 맺지 않을 때 임박한 심판의 위협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 과원지기를 중심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당신께 응답하기를 기대하시며 자비를 베푸시나 기다림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과원지기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베는 것을 연기하여 달라고 빌면서 주어진 마지막 일 년 동안 최선을 다하듯, 주님의 제자들도 주위에서 복음을 듣지 못하였거나 복음을 들었을지라도 회개함으로 반응치 않는 사람들에게 정성과 사랑을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우리의 현실 속에서 받을 수 있는 교훈

    이 비유는 종말과 심판의 필연성 및 이유와 함께 믿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태도와 헌신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기회를 부여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의 말씀(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같이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오늘의 비유에서는 그러한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는 힌트를 주고 있다.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의 종점은 심판의 순간까지이며,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듣고 목도한 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회개할 기회로 삼으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임박한 심판에 앞선 회개의 요구에 더해 위의 비유는 우리 믿는 이들을 향한 중요한 가르침도 함께 주고 있다. 주기도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믿는 이들에게 최고의 순간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임하는 때, 다시 말해 종말의 때이다. 이 땅에 심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온전한 축복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비유의 가르침을 볼 때 사모함과 기다림은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1장에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한 부분을 살펴보자.

    사도 바울은 자신이 로마 옥중에 갇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1~24)

    사도 바울은 균형 잡힌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 자신을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이나 이 땅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귀한 사역의 대상들을 위해 남는 것도 매우 필요하며 유익하다는 것이다.

    오늘 비유 속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과원지기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주위에서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참아 주옵소서’라는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다. 그러한 기도와 함께 과원지기처럼 두루 파고 거름을 주는 우리의 헌신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우리의 노력을 더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다양한 소유와 정성을 부어 주님을 전하겠습니다.’라는 기도와 행동이 필요하다. 당신은 이러한 헌신과 기도에 동참하기를 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