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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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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겨자씨(마 13:31∼32; 막 4:30∼32; 눅 13:18∼19)’ 비유와 ‘누룩(마 13:33; 눅 13:20∼21)’의 비유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비유들 중에서 분명히 서로 다른 비유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거나 유사한 메시지를 주고 있어 함께 해석해야 하는 소위 짝 비유(parable pairs)라 부를 수 있는 비유들이 여섯 개가 존재한다. 이곳에서 다루고자 하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밭에 숨겨진 보화와 진주의 비유들’, 그리고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잃어버린 양과 동전의 비유들’ 등이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비유들 중에서 가장 먼저 다루어지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둘 다 “천국은~같으니(또는 같으니라)”라 하여 천국(마태복음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 ‘하나님 나라’의 우회적 표현)의 한 특성을 가르치고 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라는 지름이 1㎜ 정도밖에 되지 않는, 흔히 작은 것을 지칭할 때 단골 메뉴로 인용되곤 하는, 조그만 씨를 사용(다른 곳에서의 예: 마 17:20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하시어 천국의 미약한 시작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으며, 다른 곳에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누룩이라는 대상(예: 막 8:15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을 통하여 누룩이 지닌 ‘내적인 능력’을 부각시키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귀한 가르침을 주시고 있다.

    1. 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관찰

    위의 비유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해석상의 어려운 점이라든가 아니면 어려운 문제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이유의 하나로 분명한 것은 위의 비유들이 먼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도 친숙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주의가 깊은 사람이라면 비유들을 서로 조심스럽게 비교하여 살펴볼 때 당장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겨자씨를 심되 마태복음에서는 밭에 심었고, 마가복음에서는 땅에 심었으며, 누가복음에서는 ‘채전’에 심었다는 것이다. 단순한 차이라고 무시하여 볼 수도 있으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렇게 차이가 있을 수 있는가에 관하여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차이에 관하여 간단히 정리하여 답을 하자면 복음서의 기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할 때 그 분의 말씀을 구성하고 있는 한 단어 한 단어의 충실한 보존을 겨냥하였다기보다는 그 분이 그 말씀을 통하여 의도하신 ‘메시지의 뜻’을 담는 데 충실하고자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흔적을 오늘의 비유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부정하다고 여겨 겨자씨를 정원에 심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누가복음의 대상인 이방인들은 겨자씨를 정원에 심었다는 것을 생각하여 볼 때 저자 누가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 본래의 의미를 유지하면서 세부적인 내용을 변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표현적/구상적 변화(representational change)’라 하는 것으로 공관복음을 서로 비교하며 읽어갈 때 차이가 있는 것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겨자씨가 자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분명히 보여주듯 ‘나무(tree)’가 된다고 하는 표현은 어느 정도의 ‘과장’이라 여길 수밖에 없다. 겨자씨는 매우 자그마한 씨의 크기에 비해 자랐을 때 상대적으로 엄청난 크기(약 2m 정도)가 된다. 그러나 이곳에서 말하고 있듯 많은 새들이 둥지를 틀 만한 나무의 크기로 자란다고 표현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는 구약의 표현들과의 연관성을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즉, 구약의 표현 중에서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지라.”(겔 17:23)와 “그 나무가… 번성하며…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 거하였었느니라.” (겔 31:5~6) 또는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단 4:11~12)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이 겨자씨와 같이 하나님 나라는, 시작은 미미하나 마지막 때에 그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졌을 때, 그 나라의 능력은 거대하며 이 세상 모든 나라들에게 쉴 곳을 제공할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작과 끝을 대조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문학적으로 허용되는 문학적 기교인 과장법(hyperbole)을 통하여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그것은 초라한 시작과 달리 온전히 이루어졌을 때에는 대단한 영향력과 능력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이 비유를 통해 얻는 교훈

    이 비유를 통해서 주시는 교훈은 매우 단순하며 한 가지로 귀결된다. 즉 하나님 나라는, 시작은 작고 초라하게 보일지라도 온전히 자랐을 때 거대함을 소유하는 겨자씨와 같이, 그 나라가 온전히 임했을 때 영역과 외부적 성장이 거대할 것이며, 또한 누룩과 같이 보이지는 않지만 소유한 내적인 능력으로 인하여 모든 영역에 영향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갈릴리의 어부들 12명으로 시작할 당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현재 기독교의 모습이 이러한 가르침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 이 비유에서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것은 현재의 모습이 단순한 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며 더욱 더 거대하며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력을 주는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기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3. 이 비유의 교훈과 우리의 현실

    C.C.C.(Campus Crusade for Christ 대학생선교회)라는 ‘미약한’ 선교단체가 외쳐왔던 ‘오늘의 학원 복음화는 내일의 민족 복음화! 오늘의 민족 복음화는 내일의 세계 복음화!’라는 비전과 캐치프레이즈 아래 어엿이 40년 이상을 사역해 왔다. 그러한 운동의 맥을 좇아 일원으로 참여해 온 무리들 중의 한 사람으로 한국 교회의 위상과 세력을 보며 위의 비유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시는 복음의 능력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근간에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교회 성장의 둔화를 넘어 감소로 돌아선 모습과 함께 교회 각성이라는 단어까지 나올 정도로 권위와 영향력이 쇠퇴된 모습을 보며 과연 이 땅에 그러한 비전이 성취될 것인가? 아니면 그저 그러한 생각과 꿈은 ‘허상이며 망상에 불과한가’라는 회의까지 생기곤 한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캠퍼스의 복음화를 외치며 캠퍼스를 전도하는 사역자들에게서도 과연 ‘캠퍼스 복음화’라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목표가, 복음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듯한 오늘의 캠퍼스의 현실을 보며,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곤 한다.

    그러나 위의 비유들은 다시 한번 하나님 나라의 생명력과 능력을 모두가 믿고 경험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복음의 능력을 다시 한번 우리 모두가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꿈과 비전들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라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온전히 임한 모습을 상기시켜 그러한 조롱을 일축하기를 원하시며, 또한 ‘그러한 꿈과 비전들은 과연 실현 가능한가?’라는 회의론자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자신들의 사역에 최선을 다할 것을 격려하고 계신다. 특별히 누룩의 비유는 이러한 우리의 비전과 꿈을 향해 ‘복음의 능력’으로 인하여 그러한 것은 결코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토록 하며 또한 그러한 결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에 대한 격려와 확신을 갖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 나라의 교회의 현실을 일대일로 대조하여 비유의 메시지를 적용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세계 어디를 돌아보아도 우리 나라의 교회처럼 역동적이며, 인적 물적 자원이 넘치며, 다재다능한 헌신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눈에 띄지 않는 현실을 볼 때 우리 자신을 다시 돌아보기를 원한다. 특별히 위의 비유 속에서 주시는 메시지가 우리 믿는 이들 모두로 하여금 다시 한번 우리 마음속에 은혜로 부어주시는 꿈을 꾸어보기를 원한다. 바로 ‘전세계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며 사회의 모든 계층들 속에 복음의 영향력으로 가득한 세상의 모습’이다. 그러한 꿈을 꾸며 그 꿈의 실현을 위해 다시 한번 헌신하는 우리가 되자. 그 순간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에 대한 확신과 믿음으로 각자의 역할을 찾아보는 우리가 되자. 경기의 승패를 이미 알고 있는 우리, 과연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