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2024년 09월 16일
예수프론트라인

예수칼럼:현대적 고전으로 읽히는 최장기 베스트 셀러!
4영리에 대하여 들어보셨습니까?
양치는소리:인터넷 선교원 후원이사 목사님들의 글모음
비전이야기:우리들의 이야기, 독자들로 부터의 글모음
선교마당:선교사로부터의 편지, 선교지소개 등 선교에 관한 글모음

각종 자료 연결
영원한 명시
박광택코너

교회-단체연결

Vision2000

김준곤 예화모음

박성민의 성서보기

경제전망대

천일웅 변호사 이민법 칼럼

인터넷이모저모




동아일보
전자신문
조선일보
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한국일보
미주한국일보
한겨레신문
라디오서울USA
The New York Times



  • 그때까지는 그냥 놓아두실 것입니다.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곡식(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 36~43)

    농촌에서 자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농사를 짓든지 피할 수 없는 잡초와의 전쟁을 이해할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벼농사를 지을 때 벼와 매우 유사한 '피'라는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날은 날이 갈수록 좋은 제초제 등이 개발되어 농사 짓는 것이 편리한 세상이나, 예수님 당시는 그러한 외부적 도움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배경하에서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익숙한 곡식인 밀과 그와 유사하게 생겨 함께 자라는, 우리 성경에 '가라지'라고 번역된 잡초를 비유로 드시며 하나님 나라의 한 특징을 가르치고 계신다. 우리에게 '알곡과 가라지'와 함께 예수님께서 친히 해석을 주신 매우 독특한 비유로써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도전과 함께 때를 기다리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1. 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관찰

    우리 성경에서 '가라지'라고 번역한 헬라어 원문의 단어 '지자니아'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주곡식인 '밀'과 매우 유사하게 생겨 서로 구별하기 어려운 매우 골치 아픈 잡초를 지칭한다. 모든 잡초가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가라지'도 밀보다 훨씬 뿌리가 발달되어 곡식의 뿌리와 엉켜 있어 제거하기가 쉽지 않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도 구별이 쉽지 않고 밀의 뿌리와도 엉켜 있어 종들이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28절)라고 물을 때 밭의 주인은 종들에게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29절)라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 부분에 이 비유 속의 모든 요소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다. 인자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시며 그곳에 좋은 씨와 같은 천국에 속한 아들들을 백성들로 만드셨는데, 원수된 마귀가 악한 자의 아들들을 몰래 침투시켜 겉으로 보기에 다른 이들과 구별이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변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추수꾼들인 천사들을 보내시어 하나님 나라 속에 결코 존재할 수 없는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모든 시험의 원인들)을 제하며, 또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같이 보이나 실제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골라내어 영원한 형벌을 받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 이 비유의 메시지이다.

    이 비유와 함께 주신 해석을 보면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왜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주셨는가.'라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어떠한 상황이었기에 이러한 가르침이 필요했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성경속에서, 또한 우리 인간의 일반적인 특성을 통하여 찾아 볼 수 있다. 특별히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을 좇는 것 같으나 실제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그를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며(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6:66), 정중하게 초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마리아인들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눅9). 이러한 상황하에서 제자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와 유사한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도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복음의 원수들'을 향하여 축복보다는 '저주'를, 또한 '시원찮은'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따끔한' 맛을 통하여 복음에 누가 되지 않게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또한 히브리서(12:15)나 신명기(29:18)에서도 보면 불신이라는 결과를 낳은 잘못된 가르침인 '쓴 뿌리'(히12:15)등을 '당장 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모습속에서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들이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는 그러한 우리 인간의 인내와 참을성이 부족한 면을 조심스럽게 경고하고 있다. 분명하지도 않은 상황하에서 또한 희미한 인간의 판단력을 가지고 가라지를 제거하려다 곡식까지도 잃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가라지를 하나님의 나라 가운데 심은 원수의 의도한 결과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2. 비유를 통해 얻는 교훈

    이 비유 속에 나오는 세 주요 등장인물들을 통하여 다음 세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곡식과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섞여 있는 것을 허락하는 주인처럼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까지 이 세상에 악인들과 의인들이 함께 존재하기를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둘째, 마치 가라지가 추수 때에 거두어져 불살라지는 것같이 악인들은 궁극적으로 분리되어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다.

    셋째, 곡식이 추수 때에 거두어져 곳간에 보관되듯 의인들도 함께 모아져 상급이 주어지며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 것이다.

    3. 이 비유의 교훈과 우리의 현실

    위의 비유를 읽으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무엇을 지칭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간단히 설명하였듯이 신약에서 이 표현이 쓰여질 때, 때로는 넓은 의미로 때로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어지는데 주어진 문맥 속에서만 그 구별이 가능하다. 좁은 의미로는 '생명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며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중재하시는 보편적 의미로써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넓은 의미 속에는 생명이 있는 자들과 생명이 없는 자들 모두가 속할 수 있다. 바로 위의 비유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의미가 이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실상 1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부정과 부패로 인하여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낙선 운동 대상자의 43퍼센트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보편적 의미로 보는 하나님 나라 속에 함께 존재하는 가라지와 알곡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외에도 생명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듯하나 실제로는 사망으로 이끄는 이단의 가르침이 존재하는 것도 그들이 넓은 의미의 하나님 나라 속에 속해 있기에 가능함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며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며 대처하여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이 비유는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비유에서 암시하고 있듯 그들을 구별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치리(discipline)'하며, 필요하다면 '징계(punishment)'를 하여야 할 상황이 발생할 때 우리는 어떻게 행할 것인가? 이 비유에서는 그러한 경우 성급하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나, 지나치다 할 정도로 남을 판단하며 정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시며, 그때까지 우리는 인내하여야 하며 때로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우리의 몫과 역할이 전혀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책에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듯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의 가르침은 그것이 속한 문맥과 배경을 이해하며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한적인' 한 가르침이 다른 곳에서 반복하여 가르치고 있는 '분명한' 원리를 뒤집을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교회의 교리적, 윤리적 순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은 이곳에서 우리의 힘으로 완벽하며 온전한 순결함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는 이 치리(discipline)와 용납(tolerance)의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쉽지 않지만 피할 수 없는 역할을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온전히 갈라내시는 그때까지 감당하여야 한다.

    결국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없으며, 우리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중에도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기대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그러한 사실이 현재 의와 불의가 함께 섞여 있는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우리 모두가 위로를 받으며 또한 그러한 심판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대한 기대를 가지도록 한다. 치리와 용납의 선택에서 주로 치리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는 우리 교회의 현실을 향하여 오늘의 말씀은 균형을 찾도록 도전하고 계신다. 각자에게 물어보자. 위의 비유가 '문제 있어 보이는 이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에 어떤 변화와 도전을 주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