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집터를 살펴보세요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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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집 짓는 자’의 비유(마 7:24∼27; 눅 6:47∼49)
팔레스타인 지역 대부분의 영역은 강수량이 매우 적어 거의 사막이거나 준사막 지대에 속한다. 시편 기자의 표현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에 비유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형과 기후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또한 나무도 많지 않아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마른 풀로 덮인 마른 땅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곳들도 우기가 되면 물이 차서 강으로 변하는 와디(wadi)라는 곳으로 변해 버린다. 오늘의 비유는 이렇게 평상시는 아무런 차이를 볼 수 없으나, 비가 왔을 때 순식간에 변할 수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특별히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의 집들이 진흙을 단단히 이겨 만들어졌고 진흙의 특성상 물에 매우 약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볼 때 가급적 물을 피해 단단한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사람이 경험하고 동의할 수 있는 상식적인 지식을 비유의 대상으로 이용하셔서 제자도에 관한 귀중한 가르침을 주고 계신다.
1.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관찰
이 비유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곳에 기록되어 있다. 이 두 곳에 기록된 비유를 서로 비교해 보면, 비유의 기본적인 흐름은 동일하나 세부사항에서 서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 다른 곳에서 언급하였듯이 이러한 차이는 특별히 저자 누가가 복음서의 대상인 헬라 문화에 익숙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나 또는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누가복음을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한 실례들을 오늘의 비유의 배경이 되는 그 당시 집과 그 집을 짓는 데 있어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행하던 건축 양식과 헬라 문화에 젖어 있는 곳들의 건축 양식의 차이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집들의 대부분은 진흙을 이겨 지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구멍을 뚫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모습들을 성경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6장 19절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와 마가복음 2장 4절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에서 알 수 있듯이 진흙으로 지어 쉽게 구멍을 뚫을 수 있었으며, 지붕도 보통 가지나 골풀들을 엮은 후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만들었기 때문에 지붕을 뜯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복음을 보면 같은 사건을 기록하면서도 복음서의 대상을 염두에 두고 변화를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누가복음 5장 19절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의 예와 같이 헬라식 집을 염두에 두고 표현을 고쳐 기록하고 있다. 바로 복음서를 접하는 대상을 염두에 두고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의도적으로 변화를 준 것이다.
이러한 저자 누가의 의도적 변화를 이 비유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단순히 주초(foundation)를 반석 위에 두는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는 깊이 파서 주초를 놓는 작업을 더하고 있다. 또한 단순히 비가 오고 물이 불며 바람이 불어와서 집에 부딪히는 팔레스타인의 날씨와 지형적 특성을 내포하고 있는 부분을 바꾸어 일반적인 홍수가 났을 경우를 부각시킴으로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인 주초를 제대로 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그대로 유지시켜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핵심에는 변화가 전혀 없다. 바로 집을 짓는 데 있어서 기초의 중요성이 당연하듯 예수를 좇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집을 짓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 상식을 무시하는 행위와 같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계신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 당시 랍비들 중에 논쟁의 초점이 된 한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더욱 의미가 있다. 바로 율법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에 대한 토론이 행하여질 때, 대부분이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한 결론의 이유로 ‘듣지 않고 어떻게 행하겠는가?’라는 논리가 주어지는 분위기였다. 예수님도 듣는 것의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고 계신다. 오히려 그러한 질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순점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계신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참된 제자도는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행함’에 있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2.이 비유를 통해 얻는 교훈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 두 가지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마치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마치 주초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모래/땅 위에 집을 짓는 자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러한 제자의 삶을 좇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는 결국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결국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의 질문은 궁극적으로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질문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3.이 비유의 교훈과 우리의 현실
위의 비유는 그 위치가 매우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산상수훈이라 여겨지는 5∼7장의 가르침의 마지막 부분에 또한 누가복음에서는 ‘평지(plains)’에서의 가르침을 담은 6장의 마지막 부분에 나와있다. 각각의 위치에서도 분명히 나타나듯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듣고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부분이 없었다면, 또한 그러한 ‘행함과 심판’의 관계에 대한 명시가 없었다면 이 비유들 앞에 주어진 예수님의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은 단순히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가르침에 불과했을 것이다.
한국인들의 한 특징으로 종교성을 들며 특별히 경전에 대한 특별한 사모함을 지적하곤 한다. 그러한 예는 불교에서의 팔만대장경을 금속활자로 만들었으며,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초기에도 경전에 대한 일반적 사랑이 복음 전파에 귀중한 역할을 감당하였다는 교회사 학자들의 평가를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에도 성경을 더욱 더 빨리 많이 읽을 수 있도록 속독을 배우는 사람들이 있으며, 성경을 읽을 뿐 아니라 손으로 직접 쓰는 등 성경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는 독특한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매우 좋은 자질이고 귀중한 모습이며 더욱 더 격려되어야 하며 더욱 더 활성화되어야 할 우리 민족의 매우 긍정적인 특성이다.
사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섯 곳에 묶어 (5∼7장, 10장, 13장, 18장, 23∼25장) 기록함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으로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비유에서와 같이 가르치고 배우는 그 자체로 그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도가 아니며, 그 배움 자체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계신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것 자체 속에는 그 말씀을 지키고 행하기 위해서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져 있어야 한다.
유사한 맥락에서 야고보 선지자는 말하고 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1:22∼24)”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마치 거울을 보듯 우리의 모습을 보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위의 비유는 결코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지상 명령으로 주고 계시듯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는 이러한 두 측면 모두를 강조하고 있다. 올바로 가르쳐 지키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먼저 배우며, 또한 행하는 부분이 없이는 결코 온전한 가르침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의 기초는 ‘듣고/배우고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각자에게 질문하여 보자. ‘내 신앙의 집터는 튼튼한 반석 위에 서있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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