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주가 필요합니다.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
|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눅 18:9∼14)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웅장한 건물들과 그 건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벽들로 구분된 여러 뜰들(courtyards)로 이루어져 있었다. 성전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신분(제사장, 일반 유대인, 이방인)과 성별(유대인 남녀)에 따라 들어갈 수 있는 영역이 정해져 있었으며, 매일 아침(9시)과 오후(3시) 제사가 행하여질 때, 무리들이 자신들에게 허락된 뜰에서 함께 기도를 드렸다. 그 외 시간에서 성지를 찾은 순례자들 또한 개인적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찾아온 예배자들로 메워졌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의 성전은 그곳에 참여한 사람들의 (아마도) 커다란 기도 소리로 인해 고요하기 보다는 소란스러운 모습에 더욱 가까웠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성전에서 이렇게 기도하는 모습에 익숙한 청중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모이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발견될 수 있는 두 종류의 사람을 택하여 한 귀중한 가르침을 주시고 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이 비유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는 교훈을 담고 있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다음에 연속하여 주어지고 있으며, 또한 비유 속에 ‘기도’라는 단어가 나올지라도 단순히 기도에 대한 일반적 가르침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우리 모두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1.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관찰 먼저 이 비유가 주어진 대상에 관하여 살펴보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9절)이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즉 두 가지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자’ 또한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라고 하여 어떤 특정한 그룹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러한 성향이 있는 사람들 모두를 향해 주어졌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물론 그러한 범주에 이 비유의 주인공의 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바리새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속하였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데 무리는 없다. 비유 속의 두 사람의 기도를 비교하여 보면 매우 흥미롭다. 먼저 나오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나는’(11, 12절)이라는 단어를 두 번 사용하면서 본인에 대해 부정적 표현과 긍정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죄인’과 같지 않으니 감사하고, ‘의인’의 삶을 사니 감사하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의 ‘의인의 삶’의 묘사를 살펴보면, 그의 삶은 한마디로 성경의 요구대로 살며 때로는 그 이상의 것을 행하는 매우 율법을 잘 지키는 삶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성결한 삶’(토색, 불의, 간음을 범치 않음)을 살며, 율법에서 요구하지도 않는 월요일과 목요일을 나라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였고, 십일조를 충성스럽게 드리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리의 기도를 살펴보면 ‘나는’(13절)이라는 단어 후 나오는 표현 속에 자랑도 없으며 주장도 없다. 오히려 그 당시 주로 여인들이 취하던 행위라고 알려진 ‘가슴을 치는’ 행위로 그의 심중의 깊은 애통을 표현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모습이 전부이다. 이러한 그의 애통해 하는 모습은 멀리 서서(13절)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부각되어 있다. 자신의 죄를 돌아보며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도 못한 채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사람간의 차이는 한마디로 한 사람은 자신의 ‘선함’을 알았고, 한 사람은 자신의 ‘악함’을 알았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하여 설명하신 후 예수님께서 만약 “누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셨겠느냐?”라고 비유를 듣는 사람들에게 물으셨다면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바리새인의 것’이라고 답하였을 것이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로운 모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으니 하나님께서 당연히 기쁘게 받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세리의 경우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율법을 좇아 속건제(guilt offering)도 드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가 인정하듯 궁극적으로 죄인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판결을 내리신다. “이 사람(세리)이 저(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이에 내려 갔느니라”(14절)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말씀하신다. 두 사람의 기도를 비교하며 과연 어떤 이유로 그러한 결론을 내리셨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특별히 이곳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살펴보면 과연 삶에 ‘하나님이 필요한 영역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그 자신의 ‘완벽함’을 고백하는 기도를 들으며 ‘그에게 과연 하나님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리의 기도 속에는 ‘하나님만이 저에게 필요합니다’라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자신을 낮추는 자와 높이는 자’의 차이,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라는 조건을 더할 때 우리가 취하여야 할 자세는 매우 자명하다. 2.이 비유를 통해 얻는 교훈 이 비유를 통하여 다음 두 가지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비유 속의 한 바리새인과 같이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지 않으며 결국 초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향한 과대평가는 남을 무시함과 동시에 그의 삶에 하나님의 필요성조차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세리의 애통함을 통해 분명히 보여준 자신을 낮추는 모습은 결국 높임을 받는다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에서도 분명히 보여 주듯이 자신의 참모습을 보고자 노력하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결론으로 주신 말씀이 이 두 가지를 가장 온전하게 요약하고 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심으로 이 땅에서의 삶에 더해서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의 마지막 심판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3.이 비유의 교훈과 우리의 현실 인간의 특성 중의 하나는 다른 이와 비교를 통해 자신을 평가하는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잘하는지 못하는지’ 또는 ‘얼마나 잘하는지’를 정하는 평가기준이 ‘비교’라는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교육제도에 익숙한 우리의 현실로 인하여 이러한 성향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용는 이러한 잣대를 신앙생활에까지 적용하려고 드는 것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믿는 이의 신앙 기준은 비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말씀에서 분명히 보여 주듯이 ‘온전하며 완전하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족할 수 없으며 또한 그러한 정도에 이르기 위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끊임없이 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른 이와의 비교를 통해 ‘우위’를 정하려 할 때 우리는 결국 ‘도토리 키재기’라 평할 수 있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생각하며 최근에 유행하였던 복음 성가 중의 하나인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원곡: 스티브 그린[Steve Green]의 ‘People Need the Lord’)라는 노래를 생각해 본다. 특별히 이 비유에서 한 바리새인의 모습 속에 그가 의도했든 안했든 간에 비추어진 ‘하나님이 그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듯한 자세’를 보며 소위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경고되어져야 한다. 그 노래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가 필요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비유를 통해 그러한 메시지의 대상을 확대시켜볼 수 있다. 바로 ‘주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믿는 사람들 중 어떠한 신앙의 상태에 있든지 초보자이든 신앙이 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든 관계없이 우리 모두에게 주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목표 자체가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이며, 이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며 당신은 “주님 저는 위의 비유 속에 나오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 바리새인의 모습을 닮지 않겠습니다. 주님 없인 살 수 없습니다. 제 삶의 모든 영역에 주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라고 고백하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