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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낮은 자리를 취하라”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잔칫집에서의 높은 자리’의 비유(눅 14:7∼14)

    복음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 시대 사회의 규율을 벗어나 사역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 당시의 기득권 층에 매우 불편한 존재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안식일을 지키라는 율법을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라는 극단적인 ‘문자적 해석’ 하에 과연 어떠한 움직임까지가 일에 해당하는가를 논하던 바리새인들에게는, 일할 수 없는 안식일에 병도 서슴지 않고 고치시는 예수님이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백성들에게 높은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예수님께 대항할 수도 없는 상황 하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떻게 하든 덫을 놓아 그의 명성에 치명타를 주는 것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위 비유의 배경도 이러한 역사적 상황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분을 넘어뜨리기 위해 베풀어진 식사에 초대 받은 예수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등장한다. 과연 이 사람이 안식일에 그를 고칠 것인가? 아니면 해가 넘어가기를 기다려 즉 안식일이 지난 후 행할 것인가? 이러한 생각을 품으며 지켜보고 있는(1절)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 고침이 합당한가’라는 질문에 잠잠한 그들 앞에서 환자를 고쳐버리신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향해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으로 그들이 항의하기 힘든 상황과 연결시킴으로 그들을 또 다시 잠잠케 하신다. 결국 다른 곳에서 말씀하시듯 ‘안식일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다’(막 2:27)는 원리를 가르치심과 동시에 그들의 안식일에 대한 이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계신다. 이러한 ‘껄끄러운’ 상황 하에서 오늘의 비유로 이끄는 사건이 전개된다.

    1.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관찰

    우리의 풍습에도 그러하듯 어느 자리든 상석이 확실히 정해져 있다. 이러한 ‘자리 매김’이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던 그 시대에 요청을 받지도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상석에 앉는 바리새인들이 눈에 띠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 당시 뭇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터인지라 그러한 행동은 매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 ‘엿보려 하는’ 의도를 가지고 참가하였으며, 그들의 눈앞에서 ‘안식일을 범한’ 사람을 향해 아무 말도 못하던 사람들이 상좌에 가서 자연스럽게 앉는 장면은 어색하기만 하다.

    이러한 상황이 예수님에게 오늘 비유의 전반부를 이끄는 역할을 하게 만든다. 전반부의 말씀의 가르침은 매우 간단하다. 구약 잠언의 한 부분으로 정리되어질 수 있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 하지 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너더러 이리로 올라오라 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 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잠 25:6, 7). 그 당시 자리 매김의 순서는 비교적 간단하였다. 잔치의 주인공이 테이블의 최고의 상석에 앉으며 그의 왼쪽, 오른쪽, 그 다음 다시 왼쪽, 오른쪽으로 서열이 정하여져 있었다. 특별히 주인공 바로 옆의 왼쪽과 오른쪽 자리는 가장 ‘어른’이 앉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중이라도 더 높은 이가 나타난다면 변경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예수님을 엿보기 위해 동석한 바리새인들은 망신을 당할 가능성을 가진 채 주인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자리에 선뜻 앉아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절)는 가르침을 주신다. 물론 이를 통해 예수님은 단순히 소위 말하는 ‘사회적 예의’나 세련된 ‘테이블매너’, 아니면 성공하는 ‘처세술’을 위한 가르침을 주시고자 한 것이 목적이 아니셨다.

    그 이상의 중요한 메시지가 있음을 우리는 연속하여 예수님을 청한 주인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를 향하여 갚을 수 있는 자들을 청하기 보다는 갚을 수 없는 자들을 청하라(12절)고 말씀하신다. 특별히 구체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신체 장애인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13절)는 말씀으로 그러한 요청이 단순히 인도주의적 차원에서의 행위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심을 분명히 하신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같이 식사를 한다’는 의미는 코이노니아, 즉 ‘교제·나눔’이라는(현재도 많은 경우가 그렇지만) 개념과 상통한다. 즉 다르게 말해 서로를 동일시(identification)하는 행위이다.

    남에게 단순히 베푼다는 개념을 초월하여 서로의 동등함을 인정하는 행동인 것이다. 또한 위에서 명시한 그룹들(가난한 자들, 병신들, 저는 자들, 소경들)은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천국 잔치의 비유에 연속적으로 등장함으로(21절) 이 모든 가르침이 결국 예수님 메시지의 중심이었던,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종말적 사역인 인간 사회의 변혁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계신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의 사역의 모델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듯, 자신을 낮추어(겸손) 오히려 남을 섬기는 모습과, 많은 필요를 가진 자들을 돌보는 희생적 사랑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계시는 것이다.

    2.이 비유를 통해 얻는 교훈

    이 비유는 예수님의 변혁의 사역에 동참하며 변혁의 나라의 시민인 우리들에게 다음의 두 가지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필요한 시민의 모습은 위에서 그려진 바리새인들의 ‘스스로 높은 자리를 자청하는 교만의 모습’과 ‘스스로 의롭다고 잘난척하는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심령이 가난한 모습’으로 겸손히 살아갈 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으며 이 세상에서도 존경을 받을 수 있다.

    둘째,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변혁의 사역의 한 모습인 필요한 자들에게 베푸신 특별한 희생적 사랑의 중요성을 실감하며 닮아가려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이기적 성향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하기 힘든 그러한 영역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행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3.이 비유의 교훈과 우리의 현실

    우리가 사는 현시대는 두 가지 철학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있다고 흔히 평가되어진다. 한 가지는 자아도취(narcissism)라는 것이며 또 다른 한 가지는 물질주의(materialism)라는 것으로 현대인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에 편승하여 메마른 세상을 더욱 더 심각한 이기주의적 사회로 만들어 가고 있다. 오늘의 비유는 한 마디로 알게 모르게 이 두 ‘주의(-ism)’들의 영향 하에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향한 정면 도전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도전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인하여 그 분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은 이 땅에서 받아들여지는 ‘통념’과 ‘관례’를 좇기 보다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좇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자기 홍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튀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다. ‘겸손’은 내놓을 것이 없는 자들이 하는 구차스러운 변명처럼 여기고 오히려 별로 내놓을 것이 없는 경우에도 극대화하여 과장하며 자신을 소개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잘남’을 얘기하며 그 ‘잘남’에 부합하는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 즉 ‘우리의 잘남’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라 여기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며 사람들을 섬기며 사는 자들이 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또한 겉으로 내어 놓고 표현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사람들의 모든 행동 속에서 ‘돈이 최고이며 돈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가득한 세상 속에 거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가지고 있는 소유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혹시 남을 향한 베풂 또는 친절까지도 계산적이거나 과시적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나 하는 것이다.

    결국 겸손과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결단의 용기가 필요하다. 오늘의 비유의 가르침은 자기 과시가 하나의 덕목으로 되어 버린 현실을 개탄하게 만들고 있으며, 개인적인 이기적이며 계산적 사랑이 팽배한 세상에 사는 우리들을 향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각자에게 진솔하게 물어보자. 나는 얼마나 겸손하며, 얼마나 대가 없는 베풂의 삶을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