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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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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본은 필요합니다”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왕자의 결혼식’의 비유(마 22:1∼14)

    이비유는 겉으로 보기에 누가복음 14:16∼24의 ‘큰 잔치의 비유’와 매우 유사하다는 이유로 마치 같은 메시지를 주고 있는 듯 취급되곤 하나, 마지막 부분에서 다른 결론으로 유도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즉, 누가복음의 비유에서는 ‘초대받은 자들의 거부를 향한 경고와 함께 예상치 않은 이들의 복 있는 잔치에 참여함’이 강조되어 있는 반면, 이 비유는 ‘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에 더 강조점이 있다. 결국 이 점이 이 두 개의 비유들을 별개로 취급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 두 개가 온전히 별개의 것이라는 주장은 아니다. 오히려 강조점이 다르다 할지라도 서로 보완함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잔치에로의 초대’)과 우리 인간의 응답에 관한 진리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의 ‘큰 잔치의 비유’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이 비유를 대할 때 우리는 온전한 신앙생활에 관한 감사와 도전의 삶을 배울 수 있다.

    1.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관찰
    이 비유에서는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시작함으로 여기서의 잔치는 자신의 아들을 위하여 다른 이가 아닌 왕이 직접 관심과 정열을 기울여 베푼 여느 잔치와는 다른 잔치였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 당시는 왕의 ‘초대’가 왕의 ‘명령’이라고 여겨지던 때였음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이렇게 준비된 잔치를 향해 초대받은 이들이 ‘오기를 싫어하는’(3절) 행위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이러한 그들의 선택은 왕자를 무시함과 동시에 왕자의 혼인을 인정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그 왕자의 아버지를 향한 충성도 거부하는 자세이다. 그러나 왕은 그들이 마음을 바꿀 것을 바라며 다시 한 번 종들을 보내어 잔치의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음을 알렸으나(4절) 그들의 반응은 왕의 기대를 역행할 뿐 아니라 더욱 더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되어 버린다.
    초청을 향한 이해 못할 냉대(‘저희가 돌아 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5절)를 뛰어넘어 왕이 보낸 종들을 능욕하고 죽이는(6절)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행위를 범한다. 이제는 왕을 무시할 뿐 아니라 반역의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들의 이러한 행위로 인해 스스로 자초한 멸망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7절). 이러한 상황에서 왕은 모든 것이 준비된 왕자의 혼인 잔치에 초청받은 자의 범위를 제한없이 ‘누구든지’(‘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9절)로 확대하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종들이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10절)를 그 잔치로 초대한다. 만약에 여기서 이 비유가 끝을 맺고 있다면 누가복음의 ‘큰 잔치의 비유’와 메시지에서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비유는 여기서 끝을 맺고 있지 않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들을 통한 무자격 초대에 응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잔치로 입장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이곳에서 설명되지 않았으나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초대받은 이들에게 입장시 왕자의 혼인에 걸맞는 의복(‘예복’)을 입을 것을 요청받았을 가능성이다. 만약에 그러한 절차가 없이 ‘예복’을 안 입었다는 이유로 밖으로 쫓아낸다면, ‘누구든지’라고 초청한 원래의 취지에 전혀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왕이 사랑하는 아들의 혼인 잔치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옷을 입히어 기쁨과 행복의 분위기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한 왕의 의도를 읽지 못한 다른 이들과는 다른 복장을 하고 들어오는 한 사람이 그곳에서 쫓겨나, 후회로 가득하여 이를 갈며 슬퍼하는 처지가 되어 버린다. 결국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리라’라고 결론을 맺음으로 누구나 초청 대상이 되나 잔치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며 그러한 준비를 갖춘 자만이 들어갈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잔치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 볼 때 ‘예복’은 예수님의 구속의 피를 통한 ‘회개, 용서, 의로움’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부분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며 그를 좇는 자들을 향해 그 분을 개인의 주와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그 분의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2.이 비유를 통해 얻는 교훈
    이 비유를 통해서 주시는 교훈의 일부는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누가복음의 ‘큰 잔치의 비유’와 매우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왕자의 혼인 잔치에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초청하는 왕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그 분의 나라로 들어오도록 초청하고 계신다.
    둘째, 그의 초청을 무시하며 반역하며 거절하는 자들이 궁극적으로 왕에게 멸망을 당하였던 것 같이,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는 자들은 결국 처벌을 받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초청의 심각함과 중요성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셋째 교훈에서 이 비유의 독특성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받아들였다고 생각되어지는 자들이라도 적절하게 준비되지 못한 자들은 영원한 벌을 받게 된다. 항상 깨어 준비된 삶을 사는 모습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

    3.이 비유의 교훈과 우리의 현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는가?’라는 항의 섞인 비판을 비신자로부터 가끔 들을 때 부끄러워진다. 이러한 부끄러운 모습이 존재하는 이유는 교회 속에 지극히 다양한 사람들이 섞이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무리들 중에 두 양극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자.
    먼저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가 설 여지가 없을 정도로 율법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 행위를 강조하되 지나쳐 행위가 구원의 평가 기준이 되어 버린 사람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결국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는 말씀에서 지적하듯 인간의 ‘죄성’이 있음을 볼 때 결국 율법주의자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모습과는 정반대편의 스펙트럼에 존재하는 형태로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는 그럴 듯 하지만 성경에서 찾을 수 없는 신앙을 가지고 사는 무리들이 있다. 이들은 행위란 액세서리와 같이 없어도 좋고 있으면 좋게 여기며 사는 무리들로 ‘기독교 방탕꾼들’이다.
    성경에서는 이 두 종류의 사람들 모두 문제가 있는 자들로 평가하고 있으며 한쪽으로 기울어진 잘못된 신앙을 가진 자들이라 가르치고 있다. 성경 속에서 가르치고 있듯, 예수를 개인의 주와 하나님으로 믿으면 빛에 속한 자들이며, 빛에 속한 자들이라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여야 한다.
    이러한 성경적 가르침대로 우리는 ‘믿음과 행위’라는 흔히 떼어서 취급하기 쉬우나 결코 분리되어질 수 없으며, 분리되어져서는 안 되는 ‘한쌍’을 가지고 하나님의 잔치를 위해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 비신자들이 선택하고 있는 ‘행위를 통한 평가’에도 결국 좋은 점수를 얻는 부수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오늘의 비유는 특별히 자신은 당연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현대 기독교인들을 도전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의로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또는 나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오늘의 비유는 나와 전혀 관계가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안이한’ 신앙 상태를 점검하게 만들고 계신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전 9장 27절의 사도 바울의 고백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사도 바울과 같이 ‘구원의 완성’을 향해 항상 쉬지 않고 애쓰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이 비성서적이라거나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자아에 관하여 올바른 자아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나 자신에 관한 지나친 자부심으로 발전시켜 교만하게 되는 것이 문제가 있듯이, 구원을 향해서도 확신을 갖되 자신을 연단하여 준비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잔치에 들어가는 자에게 요구되는 기본이다. 그러한 기본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당신은 그 잔치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