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2024년 09월 18일
예수프론트라인

예수칼럼:현대적 고전으로 읽히는 최장기 베스트 셀러!
4영리에 대하여 들어보셨습니까?
양치는소리:인터넷 선교원 후원이사 목사님들의 글모음
비전이야기:우리들의 이야기, 독자들로 부터의 글모음
선교마당:선교사로부터의 편지, 선교지소개 등 선교에 관한 글모음

각종 자료 연결
영원한 명시
박광택코너

교회-단체연결

Vision2000

김준곤 예화모음

박성민의 성서보기

경제전망대

천일웅 변호사 이민법 칼럼

인터넷이모저모




동아일보
전자신문
조선일보
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한국일보
미주한국일보
한겨레신문
라디오서울USA
The New York Times



  • 결론이 중요합니다 두 아들의 비유(마 21:28∼32)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온 가족이 함께 경작하는 조그만 포도원을 소유하고 있는 아버지와 그의 두 아들 사이를 배경으로 두고 있는 이 비유는 동서고금을 초월하여 모두에게 익숙한 부자(父子)간의 관계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긴장감과 갈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 비유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 팔레스타인이기 때문에 포도원일 뿐이지, 이 비유의 상황과 유사한 가족 모두가 경영하는 어떠한 모습의 사업장도 그 배경으로 선택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비유는 현대판으로도 어렵지 않게 각색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주위에서 점점 더 쉽게 발견되어지고 있는 깨어져 가는 인간들간의 관계, 특별히 부자간에 존재하는 평범하며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이 세상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한 상황과, 또한 우리 인간들이 취하여야 할 태도의 중요성을 부각시키시고 계신다.

    1.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관찰
    이 비유의 한 특징을 지적하자면, 비유로 이끌고 있는 상황과 비유의 마지막 부분인 “요한이 의(義)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32절)를 통해 분명히 나타나듯 이 비유는 세례 요한과 그의 사역에 관한 예수님의 이해를 나타내고 있다.
    세례 요한에 관하여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의 스스로의 고백인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마 3:11)라는 말씀을 떠올린다. 또한 예수님의 그를 향한 평가인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세례 요한)보다 크니라”(마 11:11)라는 말씀에 익숙하기 때문에 이 비유 자체가 세례 요한과 그의 사역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세례 요한 자신과 예수님의 그의 대한 평가는 그러한 표현이 주어진 상황 하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즉, 그의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상대적 자신의 위치를 고백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 이전의 시대를 마무리하는 사람으로서의 세례 요한임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례 요한은 그 당시 상당히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 당시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능력이 많은 선지자였다고 묘사하고 있으며, 또한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가 그를 처형한 사실(마 14장) 등은 그 당시 그의 커다란 영향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주시도록 실제적으로 원인 제공을 하고 있는 것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의 질문을 살펴봄으로써 발견할 수 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마 21:23)라는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마 21:25)라는 되받기 식의 질문으로 그들을 덫에 치이게 함과 동시에 더 나아가 그들의 질문에 대한 간접적 응답을 주고 계신다. 바로 세례 요한에게 부여된 권세와 예수님의 권세의 근원이 같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동일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와 그 분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주 사역이었던 요한의 권세는 결코 예수님과 비교되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오히려 그 권세의 근원의 동일성을 부각시키고 계시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시사하는 점은 매우 크다. 비록 세례 요한의 권세가 예수님에 비해 작을지라도 그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와 그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행동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헌신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을 고대하고 있다고 말하던 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진작 세례 요한을 통해 ‘변혁’의 메시지가 전해졌을 때 뒤로 물러서며 무시하는 모습을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빗대어 질책하고 계신다.
    그리고 또한 이들과는 대조로 실제적 삶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는 듯 살아가던 ‘세리와 창기’들은 세례 요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회개의 메시지가 전하여졌을 때 열정적으로 응답하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이러한 비유를 통하여 ‘변혁의 성격을 지닌 복음’을 변호하고 계심과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믿지 않으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핑계’를 구하는 사고(25∼26절)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계신다.
    2.이 비유를 통해 얻는 교훈
    이 비유는 비유 속에 나오는 세 명의 주인공들을 통하여 다음 세 가지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아들들을 포도원으로 보내는 것과 같이, 그의 백성 모두에게 그 분의 뜻을 이루는 일에 동참할 것을 명하고 계신다.
    둘째, 포도원으로 가겠다고 말하였으나 결국 불순종한 아들과 같이 어떤 이들은 행함을 약속하나 올바르게 행치 않음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명령을 처음에는 거부하였으나 궁극적으로 순종하는 아들과 같이 어떤 이들은 반항하나 나중에는 회개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받아들이신다. 물론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교훈은 성경 전체를 통해 가르치고 있는 ‘오직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라는 원리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구원은 순종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는 진리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3.이 비유의 교훈과 우리의 현실
    이 비유는 상대적으로 짧음과 동시에 가르치고 있는 교훈도 매우 단순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르치는 내용이 결코 가볍게 다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구약과 신약을 통해 강조되어져 있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우리 믿는 이들이 삶 속에서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인 ‘순종’, 즉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한 사울왕을 향하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라는 말씀을 주시고 계시며, 예수님과 믿는 이들의 관계에 대하여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고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신앙생활에서 순종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케 한다.
    인생에 대한 비유들 중에 가장 적절한 비유 중의 하나를 꼽자면 마라톤의 비유를 들 수 있다. 기나긴 인생 여정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이 여정을 지나는 동안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 이 비유 속의 두 아들을 발견할 수 있다. 믿는 가정에 태어나는 축복 속에서 자랐으면서도 죄의 세계 속에 거하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는가 하면, 불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죄 속에 거하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경우도 발견한다. 이 외에도 다양한 모습이 있을 수 있다.
    이 모든 모습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를 질문하실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순종’의 모습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 우리의 의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을 진정으로 얻었다면 진정한 신앙 생활의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역의 질문에는 대답을 해야 한다.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체면을 살리기 위해 순종하겠다고 말하며 지나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그렇지, 그렇게 해야지’ 아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해 놓고 결국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그러한 행동은 결코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하는 모습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회개하며 그 분에게 돌아가는 모습이 필요하다. 강단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 수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회개의 메시지를 청종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결국 성숙한 신앙인들에게 주는 말씀은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는 것이다. 각자에게 도전하여 보자. 주님 앞에 가는 그 순간까지 말씀에 순종하며 살겠다고 말할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지키며 사는 일관성 있는 주님의 제자의 삶을 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