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2024년 09월 18일
예수프론트라인

예수칼럼:현대적 고전으로 읽히는 최장기 베스트 셀러!
4영리에 대하여 들어보셨습니까?
양치는소리:인터넷 선교원 후원이사 목사님들의 글모음
비전이야기:우리들의 이야기, 독자들로 부터의 글모음
선교마당:선교사로부터의 편지, 선교지소개 등 선교에 관한 글모음

각종 자료 연결
영원한 명시
박광택코너

교회-단체연결

Vision2000

김준곤 예화모음

박성민의 성서보기

경제전망대

천일웅 변호사 이민법 칼럼

인터넷이모저모




동아일보
전자신문
조선일보
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한국일보
미주한국일보
한겨레신문
라디오서울USA
The New York Times



  •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밤중에 구하는 벗”의 비유 (눅 11:5-8)

    인간은 성장하며 많은 것을 모방을 통해(modeling)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 이러한 것들에는 믿는 이들에게는 우리 몸의 숨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기도 또한 예외가 아니다. 다르게 말한다면 기도 또한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그 배움의 대상인 모델을 잘 설정하여야 한다. 성경 속에서 귀한 모델들을 찾을 수 있는데 가장 제일 먼저 떠오를 수 있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들 수 있다.

    특별히 오늘의 비유로 이끄는 배경이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이 제자들로 하여금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었으며 그 요청에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것을 볼 때 오늘의 비유는 이 주기도문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누가복음의 주제와 흐름과 생각하여 볼 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은 모든 면에서 당시의 유대인들의 기도와 비교하여 “혁명적”이라 평가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아람어로 “아바”)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심으로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대화를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땅에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의 특권임을 가르치시고 있다. 특별히 누가복음의 대상이 이방인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기도”보다는 “주문”에 익숙한 그들이 기도를 배운 후 그 기도의 “효력/효능”에 의심을 가졌을 수도 있다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오늘의 비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관찰

    이 비유는 그 당시에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더위를 피해 여행을 하다 한밤중(midnight)에 도착한 손님을 맞은 당황한 주인의 난처함을 상상하여 볼 수 있다. 마침 그 날 만든 먹을 것(“떡”)이 다 떨어진 차라 그는 여행에 지치고 식사를 못한 그에게 실례를 범하던지, 아니면 “벗(friend)”인 이웃을 깨우며 괴롭혀 성인 일인분 저녁 식사에 해당하는 “떡 세 덩이”를 빌려야만 하는 선택을 하여야 하였다. 이는 후자를 선택하기로 한다. 그렇게 한밤중에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그 당시의 집의 상황을 생각하여 볼 때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대문의 빗장을 걸었으며, 한방에서 가족 모두가 함께 자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그 한 방에 잠자고 있는 모든 이들을 깨워야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문을 두드려 “떡 세 덩이”를 구하였을 때 어떠한 결과를 얻을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7절에서는 “네게 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해석의 쟁점은 우리 성경에서 “강청함”(8절)이라고 해석되어 있는 헬라어 단어(아나데이아)의 의미이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성가시게 함” 또는 “뻔뻔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곳에서 이 단어가 정확히 어떤 의미로 쓰였는가에 관하여 결정이 힘들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의 초점은 분명하다. 바로 이미 잠자리에 든 “벗”일지라도 열심히 도움을 청할 때 “벗됨”을 인하여서는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성가시게 함 또는 수치를 모르는 태도를 담고 있는)”을 인하여 도움을 주는 것이 당연한데, 하물며 ‘하나님은 더욱 더 그러하신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렇게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구하여야 한다는 것은 이 비유 다음에 연속하여 나오는 9-11절의 말씀 속에서 더욱 분명하여 진다. 특별히 9절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는 명령형이 헬라어에서 모두 ‘지속하여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볼 때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의 모습이 필요하다고 가르치시고 계시는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해석적 문제는 주어진 문맥 속에서 무엇을 염두에 두고 포기하지 않고 구하라고 하시고 계시는가라는 것이다.

    특별히 3절에서의 “(일용할) 양식”과 “떡 (세 덩이)”의 단어가 헬라어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여 볼 때 하루 하루 필요한 “육의 양식(물질적 필요)”을 구하며 사는 우리들의 모습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계시며, 또한 13절에서는 “좋은 것”을 구하는 자들에게 주실 것을 말씀하며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여 볼 때 예수의 제자들로서 순간 순간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변혁의 사역에 동참하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며 살아가야 하며,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물질적 필요는 물론 그러한 삶을 사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성령의 능력을 공급하여 주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2. 이 비유를 통해 얻는 교훈

    “밤중에 구하는 벗”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기도할 때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담대하며 솔직하게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듯 “좋을 것”을 주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포기하지 말고 구하여야 한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필요를 우리들의 기대 이상으로 넉넉하게 또한 기쁨으로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들과는 달리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귀찮아 하시지도 아니하시는 그 분은 우리들의 조그마하고 하찮은 필요들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다.

    3. 이 비유의 교훈과 우리의 현실 포기하지 않는 기도의 중요성과 그러한 기도를 통하여 응답을 얻은 수 많은 증인들이 우리의 주위에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발견되어 지는 강조점은 초대 교회에서 지속적으로 전파되었음은 사도 바울의 편지 중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라는 말씀 속에서도 분명하다. 어떤 이가 표현하였듯 “기도는 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에 더하여 기도는 또한 “훈련”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이기 때문에 ‘힘이 들며’ 훈련이기 때문에 ‘노력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친구로 부르시고 계신다 (요 15:14). 이러한 것을 생각하여 볼 때 이 비유에서 말하고 있듯 세상의 “벗/친구”도 그러할 진데 진정한 친구 되신 우리의 주님은 어떻게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시겠는가?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마치 백지 수표를 받는 것과 같은 응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음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한다. 이 비유가 나오는 누가복음 속에서는 영적인 능력의 원천의 공급을 주된 강조점으로 약속하고 계신다. 또한 우리가 이러한 생각과 연관되어 오용되며 남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구절인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며 이루리라” 말씀 자체도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과 그러한 때 맺어지는 “열매”라는 각도에서 접근이 우선적으로 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바로 예수님의 뜻을 행하고 변혁의 삶을 사는데 필요한 능력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 즉 주님이 우리를 그의 제자로 부르시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외롭고 불가능한 “싸움”을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자녀들에게 귀를 기울이시며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여 주시며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특별한 관계 형성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우리가 구할 때 변혁을 이루는 삶을 위하여 우리에게 물질적인 것을 물론 더욱 더 중요한 영적인 것을 공급하여 주시는 그 분을 찬송하며 더욱 더 담대하게 그 분께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연약한 기도를 바라보며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시옵소서”라고 함께 구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