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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서를 체험하게 하소서!”?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 “용서할 줄 모르는(unmerciful or unforgiving) 종”(마 18:23-35)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단어인 “복음 (Good News)”이라는 단어 속에는 “반가운 소식”이라는 의미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는 ‘그 은혜를 경험하는 자들’에게 국한된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마치 동전의 다른 면과 같이 함께 공존하는 메시지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물론이며 그 “은혜”의 의미와 깊이를 모르는 자들, 즉 그러한 것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경고와 심판의 소식”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속담에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라는 말이 존재한다. 오늘의 비유는 소위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자들 중에 이러한 속담의 대상이 되지 않는가를 점검토록 요구함과 동시에 복음을 통하여 약속하시고 우리 모두가 경험하기를 원하시는 그 분의 은혜의 의미와 깊이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1. 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관찰

    믿는 사람들 간에 있어야 할 “용서의 중요성”은 바로 이 비유 직전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 속에서도 그리고 그 외에 다른 곳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이러한 가르침에 베드로 사도와 같은 “행동파”들에게는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라는 구체적 질문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곱번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라는 용서의 “한계”(limit)의 정당성과 “일곱번 정도”의 충분성을 자신하는 표현인 것이다. 그러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18:22)라는 답을 통하여 ‘용서의 무한계’의 법칙을 가르쳐주시며, 그와 함께 부연설명을 하듯 마치 3막으로 구성된 연극과도 같은 이 비유를 주시고 있다. 제1막에서는 임금과 그에게 빚진 한 신하 간에 전개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 사람은 왕에게 “일만 탈란트”를 빚지고 있는 자로 소개되어 있는 데 그 당시 헤롯 대왕의 나라 일년 예산이 900 탈란트 정도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사람의 빚의 양이 실로 엄청난 상황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헬라어에서 10,000이라는 단어가 가장 높은 셈의 단위였고 탈란트가 가장 커다란 “화폐”의 단위였다는 것을 고려하여 볼 때 “일만 탈란트”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양의 빚”이라고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이러한 한 마디로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것도 한심한데 “갚을 것이 없는”(25절) 상태에 빠지어 주인인 임금의 자비를 구할 수 밖에 없는 딱한 종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임금은 그의 모든 것을 팔아 갚을 것을 요구하며, 이러한 요구에 종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보면 “빈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마지막 호소를 한다. 이때 그의 생각 속에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었으면”이라는 바람 이상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엉성한” 부탁에 예상을 뒤엎고 주인은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준다. 이것으로 비유가 끝을 맺었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의 한량없음이 초점일 것이다.

    제2막은 이러한 ‘예상을 뒤엎는’ 한량없는 용서를 체험한 이 종이 자신에게 100 데나리온이라는 자신의 탕감 받은 빚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한 양(약 1/6000에 해당)을 빚진 자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두 사람이 각각 지은 빚의 양적 대조를 보임으로 제1막에서의 기대치 않은 빚의 탕감 사건이 제2막에서는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한다. 그러나 이 곳에서는 다시 한번 그러한 “순진한(?)” 기대를 뒤엎는 장면이 연출된다.

    그렇게 상대적으로 적은 액수의 빚을 진자를 무자비하게 다루는 이 “엄청난 빚을 이미 탕감 받은 종”은 제1막에서의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렇게 제2막에서의 사건이 제1막의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음은 제3막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제 3막에서는 결국 제1막에서의 사건의 무효화됨과 함께 제2막에서 자신이 행하였던 잔인한 행위의 대상이 3막에서는 자신으로 역전되어 버리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 비유 속에 나오는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1/6000에 해당하는 미미한 양의 용서와 관용의 모습이 부재한 모습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다음의 결론의 말씀으로 우리 믿는 이들의 태도를 점검하게 만드신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2. 이 비유를 통해 얻는 교훈

    위에서 언급하였듯 3막으로 구성된 연극의 모습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때 각각의 막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믿는 이들의 모든 삶과 생각의 시작점은 하나님의 자격 없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실로 엄청난 사랑과 용서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경험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항상 첫사랑의 그 기쁨을 되새기며 사는 모습이 중요하다. 둘째, 사랑과 용서를 ‘진정으로’ 체험하였다면 자신의 삶 속에 같은 열매들이 맺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생각하며 그 모습을 배우며 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절실하다. 셋째, 용서를 모르는 자들은 ‘진정으로’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지 못한 자들로 결국 불신자들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혁명운동의 행동요원 외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다.

    3. 이 비유의 교훈과 우리의 현실

    최소 매주 한번 이상 우리 한국교회 교인들은 주기도문을 외우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기도하고 있다. “어떠한 생각을 하며 이러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라고 한번 질문하여 보자. 우리의 고백이 암시하고 있듯 “마치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아 주셔도 할말없다”는 의도인가? 물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은 ‘조건부’가 아니므로 우리의 용서와 사랑에 근거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백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바로 오늘의 비유에서 분명히 가르치고 있듯 오히려 우리가 용서를 진정으로 체험하였다면 용서를 베푸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마치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과 비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의 삶에서 용서함이 부재하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결국 위의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용서를 순간 순간 경험하며 살게 하소서”라는 기도인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질문과 같이 우리는 “용서의 한계”를 묻곤 한다. 그리고 그것이 필요한 이유로 “정의구현과 진리사수”라는 명목을 들먹인다. 과연 얼마만큼으로 그러한 경계를 정할 것인가? 물론 각 경우마다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할 문제이지마는 일반적 원리는 분명하다.

    바로 오늘의 비유의 가르침 앞에 명시된 “형제”라는 단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과 연결되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사랑의 끈을 과연 어떠한 명목하에서 잘라버릴 수 있다는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물론 이 세상에는 심지어 친형제간일지라도 용서할 수 없는 그러한 범죄함이 있을 수 있으며, 미움의 대상이 있을 수 있다.

    너무나 미워서 한이 맺히어 버릴 것 같은 대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를 향해서도 예외 없이 예수님께서는 “용서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은 또한 결코 이상주의적 생각이 아니다. 그분을 저주하며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실제적으로 그러한 가르침을 실천하신 그 분의 말씀이다. 우리 삶의 거의 전부는 “인간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주안에서 형제, 자매된 자들’간에 존재하는 관계는 가장 중요한 관계이다. 그러한 관계를 염두에 두고 진솔하게 다음 질문에 답해보자. “나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하며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