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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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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향(Homecoming)의 기쁨을 맛보았는가?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 "돌아온 탕자"의 비유 (눅 15:11-32절) -

    길이에 있어서도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가장 기다란 비유이며, 내용에 있어서도 복음의 진수를 간결하나 강렬하게 전하고 있어 "복음 중의 복음 (the Gospel within the Gospel)"이라고 불리어 지기도 하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돌아온 탕자 (the Prodigal Son)"라는 제목과 함께 가장 친숙한 비유 중의 하나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과 함께 성경 안에서 예수님께서 소위 "버림 받음 자들"을 향한 사역의 동기를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같이 전하여 주고 있다. 그러나 모든 비유가 그러하듯이 이 비유 또한 우리로 하여금 뒤로 기대어 편안한 자세로 즐기도록 만들지 않는다. 우리 각자의 편견을 깨며 또한 각자의 영적인 현 주소를 파악하게 만듦과 동시에 끝없는 복음의 완성에로의 길을 걷도록 요구하고 있다.

    1. 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관찰

    이 비유는 15장 1-2절에 나오는 두 부류("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바래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사람들과 연관이 되어 있으며, 다른 어느 비유 보다도 비유 속의 세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해석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면을 지닌 비유이다. 우리에게 "탕자"라고 알려진 둘째 아들의 "탕자됨"은 누구도 간과하게 못하도록 분명하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도 바라는 듯 살아 생전에 유산을 요구하는 패륜적 행위, 그렇게 어렵게(?) 마련한 재산을 이민("먼 나라에 가")가서 다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였으며, 마침내 유대인으로서 가장 저주 받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돼지를 치는 모습으로 전락함으로 가문과 민족을 욕되게 한 자로 나타내어져 있다. 이 아들에 대한 묘사를 듣는 또는 읽는 모든 이들은 "결국 심은 대로 거두는 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에 다다라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 "품군"의 취급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가지고 환향(Homecoming)을 결심하게 된다.

    이러한 "탕자"의 "탕자됨"과 그의 환향의 결심은 아버지의 "관대함"이라는 기대하기 힘든 요소로 연이어 진다. "가문의 망신"인 둘째 아들을 기다렸을 뿐 아니라, 그를 반기려 아버지로서의 체통 또한 져버렸으며("아직도 상거가 먼데... 측은히 여겨 달려가"), 좋은 옷을 입힘으로 가족의 구성원으로 회복시키며, 권위의 상징인 가락지를 끼워주며, 종이 아니며 자유인이 됨을 상징하는 신발을 신기어 줌과 동시에 그 집의 경사임을 모든 이에게 알게하는 "살진 송아지"를 잡는 아버지의 모습은 모든 이들의 기대를 벗어날 뿐 아니라 어처구니 없게 까지 느끼게 만든다. 과연 "이렇게 좋은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라는 의문에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 그러나 이 곳에서 우리의 놀램은 끝을 맺지 않는다. 그렇게 예외적으로 "좋은" 아버지 밑에서 순종적으로 자라났을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탕자"의 형의 "탕자적" 행위에 한번 더 놀란다. 돌아온 아들에게 너그럽게 베푸시는 아버지를 향하여 돌아온 동생을 지칭하기를 "이 아들 (원어에서는 "이 당신의 아들," this son of yours, NIV)"라고 하여 다른 이들 앞에서 아버지를 모욕하는 '다른 종류의 탕자'의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더 나가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원어의 의미: "종노릇 하다")"라고 표현함으로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종'으로 또는 '품군'으로 스스로 전락시켜 버린다. 이 비유는 궁극적으로 15장 1-2절에 소개된 두 부류와 연결이 되어 있다. 예수님을 통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세리와 죄인들"과 그 것을 보며 원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두 탕자에 관한 말씀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 비유는 두 탕자를 가진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우리 인간들과 하나님 사이의 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2. 이 비유를 통해 얻는 교훈

    "두 탕자를 가진 참으로 좋은 아버지의 비유"를 통하여 다음 세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위와 같이 매우 심각한 정도의 탕자도 돌아올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듯, 아무리 커다란 죄를 지은 죄인 일지라도 그 죄를 고백하며 회개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그 분은 그러한 이들을 받아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을 정도의 죄가 없으며, 다르게 말해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구속이 가능치 않을 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를 회복하기 위해 유별난 사랑과 보살피는 모습을 보여주셨듯, 어떠한 죄인들일지라도 그러한 사랑을 받아들일 의향만 있다면 분에 넘치도록 풍성한 용서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탕자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불평하는 맏아들의 또 다른 "탕자의 모습"과 같이, 소위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들 눈에 가장 자격 없게 보이는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며 잔치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이 비유의 교훈과 우리의 현실

    다른 비유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나 특별히 이 비유는 우리로 하여금 해석을 하는 입장에 서 있기 보다는 해석을 당하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비유는 우리로 하여금 세가지 각도에서 세 번을 읽기를 요구하고 있다. 탕자의 입장에 서서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보도록 함과 동시에 현재에서도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부여하여 주신 많은 능력과 은사들을 우리 마음대로 투자하여 허비하고 있지는 않는지 질문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로 그 곳을 떠나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인생의 허비"라는 생각을 할 때 그 결과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고백으로 귀결됨을 알아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Home)"에서 그 분을 섬기며 사는 삶의 귀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돌아온 탕자"와 우리의 과거의 죄 많은 모습을 연결하여 보면서 이 비유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비유는 어느새 장자의 모습으로 되어갈 수도 있는 우리의 "바리새적" 요소를 경계하며 장자의 입장에 서서 이 비유를 보도록 요구한다.

    신앙의 연륜이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잣대로 남을 판단할 수 있다"는 "권리"와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어느새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지는 않았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잣대"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잴 수 있는가? 우리 나름대로 정하여진 잣대를 가지고 재려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를 감탄하며 감사하며 찬양하려 노력하는 한 해가 되자. 또한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그 분이 인간들을 부르시는 모습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로 이 비유 전에 기록된 양 한 마리를 잃은 목자와 한 드라크마를 잃은 여자의 비유에서는 '잃은 자를 열심으로 찾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이 곳에서는 '인내하심으로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와있다. 각자를 부르시는 모습의 다양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을 좇아 "탕자들"을 각자 독특하게 부르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이러한 것을 보며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Home)'으로 "돌아가는 것(Homecoming)"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한다. 어디까지 가버렸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돌아오는 자들을 향하여 경계와 제한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또한 닮아가는 우리가 되자. 그러한 아버지를 닮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 되는 새로운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당신은 Homecoming의 기쁨을 진정으로 맛보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