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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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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세계화를 이루자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눅 10:29-37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편견과 차별은 우리 시대 만의 문제가 아니다. 헬라 사람들 은 자신들 외의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지칭하였으며, 유대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이방인이 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러한 편견과 차별은 서로 다른 인종 간에만 제한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서로 간에도 계급이나 사회 지위의 여부를 따라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 화의 흐름에 역류하려고 몸부림 쳤던 초대 교회의 노력이 성경 뿐 아니라 초대 교회의 문헌 속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어 진다.

    이러한 초대 교회의 노력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하나님의 명 령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짐으로 시작되었다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마다 그 '사랑의 대상'에 관한 질문이 나온다. 수직적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랑의 표현 방법이 다를 뿐 이 명령을 받아 들인다는 면에서 광의 적 의미의 기독교(카톨릭, 정교, 개신교)와 심지어 유대교에서도 문제가 없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와 대조로 수평적 사랑의 대상인 "네 이웃"이라는 말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바로 "네 이웃"이 누가인가? 아니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자만 "이웃이라는 개념의 한계"가 무엇인가라 는 질문에 대해 서로 다른 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이웃의 범위 는 어디까지인가? 예수님께서 주신 한 비유 속에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있다.

    1.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관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연관하여 한 율법사가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던진다. 이 질문에서 우리가 결코 간과하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 있다. 바로 이 질문은 "누구오니이까"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웃의 개념에 대한 '정의'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내 이웃"에 강조점이 있는 즉 자신이 베풀어야 할 이웃 사랑이라는 '의무의 경계'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 분위기를 생각하여 볼 때 매우 당연한 질문이었다. 미워하여야 할 원수가 존재하듯 (마 5:43) 사랑하여야 될 이웃도 존재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율법사의 판단에는 결단코 "의인"의 "이웃"이 될 수 없는 무리들(죄인들, 병자들,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 한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답을 주시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한 비유를 주심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하신다. 강도 당해 거반 죽은 시체처럼 길거리에 버려진 (유대인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는) 한 사람과 그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말씀하신 후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사람인 "사마리아인"을 등장시 키신다. 그 당시는 이 사마리아 인들과 유대인들의 관계가 (그 당시 한 역사가의 기록에 따 르면) 특별히 예수님이 어린 시절에 일어난 한 사건인 유월절 바로 직전에 "성전 안에 사람 뼈다귀들이 뿌려진 사건"의 주범이 바로 한 사마리아인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최악의 상태로 치닫는 때였다.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의 사마리아인의 등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저 인간은 쓰러진 사람에게 침을 뱉고 저주하며 지나 갈지언정 결코 도움은 주지 않을 것이다" 라는 확신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이러한 사람들의 기대를 져버리고(?) 강도 당한 이를 과하다 할 정도로 돌보아 준다. 이러한 예상을 뒤엎는 "악한" 사마리아인의 "선한" 행동에 충격을 받은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심으로 원수에게 도움을 받는 자의 "치욕적" 경험까지 간접적으로 치르게 만드신다. 이러한 충격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편견과 차별을 뜯어 고치도록 도전하고 계시는 것이다.

    2. 이 비유를 통해 얻는 교훈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최소한 다음 세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우리가 아무리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을 베풀지 않음"을 정당화 할 수 가 없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 정케 유지하여야 한다"는 자기 정당화가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값싼 핑계일 수 밖에 없음을 이 비유는 여실히 고발하고 있다.

    둘째, 우리를 나누고 있는 종교적, 인종적, 이념적 벽을 넘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함"을 베푸는 데는 "제한 구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우리가 이것을 실천할 때 "악한" 사마리아인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온전한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셋째, 이웃이라는 개념이 상호적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고통 받는 자들의 처 지에 우리를 넣어 보아야 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 밖에 도와 줄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또한 그 사람만이 나를 도와 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어 떻게 할 것인가?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이웃의 범위를 발견하게 되며, 심지어 "원수도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과 함께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될 수 있는 것이다.

    3. 이 비유의 교훈과 우리의 현실

    지역별, 계층별, 권력유무 등으로 나누어진 우리 조국의 현실은 마치 한 그림을 수 천개의 조각으로 잘라놓은 조각들을 맞추는 퍼즐(jigsaw puzzle)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러 한 상황은 하나의 그림으로 맞추어 질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하나 과연 "누가 어떻게" 그러 한 일을 감당할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킨다. 선거 때마다 부추겨 지며 (동서분열), 경제가 어려운 시대에 더욱 부각이 되며 (부유층과 빈곤층), 비리가 있을 때 마다 표면화되 는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 그러한 분열의 모습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모든 이들을 예외 없이 "피해자"로 만들어 버린다. 결국 이러한 구도 내에서는 가면 갈수록 그 분열의 골이 깊어 질 수 밖에 없다. 롬7:24의 사도 바울의 고백과 유사한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다. "오호라 우리는 곤고한 백성이로다. 이 분열의 상황에서 누가 어떻게 우리를 건져 내랴."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증명이 되었듯이 예수님 만이 이러한 분열의 상황에 화해를 가져오실 수 있는 분이며,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보여주듯이 그 분이 몸소 실천하셨고 가르쳐 주신 '차별과 편견 없는 사랑' 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을 위해 교회는 회복과 화목의 모델이 되어야 하며 모범을 보여야 한다 (고후 5:16-21).

    "세계화"라는 단어가 범인들의 대화 속에 오르내리는 이때에 우리 믿는 이들은 "사랑의 세계화"를 실천하여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세계화'라는 표현은 타 종교와 합하자는 ' 종교의 세계화'나 "종교적 다원주의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색깔이 다른 신앙과 "타협" 하자는 "신앙의 세계화"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예수님의 구원에로의 초대가 '차별 없이' 주어지듯 우리의 사랑도 '차별 없이' 베풀어지는 '사랑의 세계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때 우리 민족의 퍼즐 조각들이 하나씩 맞추어질 것이며, 하 나님의 계획 속의 우리 민족의 모습도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모두 차별과 편견을 버리고 '사랑의 세계화 운동'을 이루기 위해 앞장 서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