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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삽시다

      박성민 간사

      목사, 연세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공학박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졸업(신약학 박사),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부총장,
      한국 C.C.C. 총무 역임
      현 한국 C.C.C. 대표


    새 천년(the New Millennium)의 분위기가 일반적으로 희망과 기대로 가득한 것은 틀림없으나, 이러한 중에도 그 동안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인류의 종말을 예견하는 사람들의 메시지가 심상치 않게 다가온다. 그러한 것들 중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으로 ‘우리 인간이 만들고 발전시켜 가는 컴퓨터가 결국 인류를 지배하며 종말로 이끌 것이다’라는 가상적 주제들이 우리를 섬뜩하게 만든다. 또 다른 종류는 유전자 조작으로 인한 우리 인간의 멸망을 예견한 시나리오다.

    이러한 사회의 현상들 앞에서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항상 종말을 염두에 두며 살아가는 삶이다’라는 말씀이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성경 속의 종말에 관한 가르침 중에서 마태복음 24, 25장은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아 놓은 곳으로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25장은 세 개의 비유들이 모아져 있는 곳으로 ‘선한 자’와 ‘악한 자’를 나누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으며, 어떤 사람들이 버림을 당하는가를 예수님께서는 비유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계신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마라나타’(‘주여 속히 오시옵소서’의 아람어 표현)라는 고백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 즉 모두가 ‘종말’을 향한 고대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특별히 종말이라는 단어가 현재처럼 흔하게 언급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 비유들은 그 주제와 연결하여 ‘과연 어떻게 종말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다. ‘열 명의 처녀들’의 비유는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가르침을 준다.

    1.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관찰

    이 비유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수님 당시 결혼 풍습을 잠깐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당시 결혼식에는 주인공들인 신랑과 신부 이외에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반적으로 신부 또래의 친구들로 구성된 열 명의 ‘신부 들러리’들의 역할이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결혼식장인 신랑의 집으로 가기 위해 신부의 집에 오는 신랑을 맞이하고, 그 후 신부와 함께 신랑의 집에 가서 결혼식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이유(예를 들어 신랑이 신부측에 지불하여야 하는 액수의 막판 흥정 등)로 신랑이 늦어지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등(나무 끝에 헝겊 뭉치를 감아 감람유를 찍은 횃불)과 함께 지속적으로 태우기 위한 충분한 양의 기름을 가지고 기다리곤 하였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위의 비유를 살펴보자. 특별히 결혼식의 주인공은 아니나 비유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열 명의 ‘들러리’들에 대한 묘사와 그 묘사의 이유를 보자. 처음 다섯은 등만을 준비한 이유로 ‘미련한 자들’로 묘사되어 있으며, 다른 다섯은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자들’로 불리어지고 있다. 이 두 종류의 무리는 서로 준비가 달랐다는 점 외에 ‘취한 행동 자체’에는 커다란 차이가 없다. 다시 말해 신부의 집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임무를 하다가 신랑의 오는 것이 지체되었을 때 이들 모두 예외 없이 ‘졸며 잤다’(5절)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 신랑이 도착하였을 때 등만을 가지고 있는 다섯은 기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으나 기름을 구하지 못해 결혼식장에 들어가지 못했고, 결국 기름을 준비한 다섯 ‘슬기로운 자들’만이 결혼식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를 지적하시면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13절)라고 결론을 맺고 계신다.

    이 비유에는 커다랗게 두 개의 이슈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첫째, 두 무리의 차이는 ‘그들의 준비성’의 차이이며, 또한 두 무리 모두 신랑이 더디 올 때 예외 없이 ‘졸며 잤다’는 것으로 보았을 때, 여기서 ‘깨어 있으라’라는 표현은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의미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단순히 ‘깨어서 그때를 기다리는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그 날의 도래를 기대하며 준비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신랑이 오는 것이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의미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과연 여기서 ‘기름’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제안들 중에 가장 많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선행, 믿음, 성령’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들은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9절)라는 슬기로운 자들의 제안 부분을 해석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오히려 가장 무난한 것은 어떤 특정한 것을 지칭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보다는 그 적용을 넓게 놓아두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된다. 즉, 기름은 주님을 만나기 위해 각자가 준비하여야 할 모든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는 것이 무난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제자로서의 충성된 삶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이 비유를 통해 얻는 교훈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다음 세 가지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신랑이 늦게 오는 것과 유사하게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완성의 순간인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늦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시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하나님 아버지만이 알고 계심’을 명심하여야 한다.

    둘째,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예수님을 좇는 자들은 그러한 ‘지체됨’을 기대하며 살아야 한다. 이러한 기대는 이 땅에서 제자로서의 삶도 더욱 끈기와 인내가 요구되어진다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 또한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마찬가지로 ‘졸며 잤다’(5절)는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13절의 ‘깨어 있으라’라는 표현은 ‘준비하고 있으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결국 순간순간을 최선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모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처럼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한 자들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지막 때가 임하였을 때 그들의 소홀함으로 인해 상황을 다르게 바꾸기에는 너무 늦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3.이 비유의 교훈과 우리의 현실

    ‘종말’이라는 이슈를 접할 때 사람들의 최대 관심의 초점은 대부분 ‘그때가 언제인가’에 있다. 그래서 ‘종말’에 관한 이단들의 가르침을 보면 이러한 사람들의 최대의 관심사를 만족시킴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러한 관점에 관하여 지극히 부정적이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에서도 24장을 보면 그 종말의 때에 관하여 ‘조짐’과 ‘징조’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 뿐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24:36)라고 하여 그때에 관하여는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바로 종말에 관하여 생각할 때 그 ‘시점’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오히려 종말을 맞이하는 ‘우리’ 스스로에게 초점을 맞추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다.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곳마다 예외 없이 연이어 더하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다음과 같이 살아야 한다’라는 ‘삶과 행동’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종말에 대한 가르침은 단순히 우리의 종말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종말’의 확실성을 인지하여 그 시각으로 현재를 평가하여 순간순간의 수많은 결정의 기준을 삼으며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위의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과학 및 학문의 발전과 겉으로 보기에 더 살기 좋아지는 이 세상을 바라보며 혹시라도 ‘이렇게 하여 결국 이곳에 낙원이 건설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언제부턴가 결국 종말이 아주 먼 미래에 속한 것으로 나의 생애에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우리는 이 말씀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항상 ‘주님의 재림’인 ‘종말의 때’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일을 포기하며 그때만을 고대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고 하루하루를 종말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의 모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 이 순간에 주님이 오신다면 당신은 어느 부류에 속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그분을 맞을 준비가 되었는가?